Sunday, December 9, 2018

짱개 출신인지 아닌지 출저를 알 수가 없던 왕건의 허울뿐이였던 짱개 북조 선비족 고구려 이름만 사칭했던 고려의 싸움 실력을 하나 알아보자


먼저 고려 충렬왕=졸렬왕

<카다안의 침입(哈丹侵入-합단의 침입)>


먼저()” 자가 들어가니 드디어 몽골의 약 80년간의 속국 식민지 신세가 되어버린 허울뿐이였던 고려

그리고 고려는 짱개 북조 선비족 고구려라는 이름만 사칭했을 뿐 선비족 고구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왕조라는 것도 알아두기 바람

그리고 "카다안(합단)의 침입" 은 학교나 한국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전쟁 중에 하나임

왜냐면?? 부끄럽고 쪽팔리니까

자 그럼 시작함

먼저 이걸 한번 보기로 하자

<1291 2 19일 합단(哈丹-카다안 도적)이 고려 북쪽을 침범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자 몽골 황제 쿠빌라이가 반문했다.

"당 태종도 이기지 못했던(唐太宗親征尙不克) 너희다.

우리가 정벌할 때도 쉽게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 조그만 도둑을 그렇게 심히 두려워하느냐?"

고려 사신 오인영은 "나라 성쇠함이 옛날과 같지 않다(古今盛衰 不同爾)"고 답했다>

- 1291 <고려사> 세가 충렬왕 17 2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전투민족이였던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훈족(흉노족) 가야 부여 진국 삼한 금나라 청나라 그리고 아메노 히보코(이즈모) 포함)때와 신라를 그대로 이어받은 고려 초때의 그 기상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도적떼들 하나 못 이겨서 저런 말을 함

카다안(합단)의 침입은 원나라 반란군이였던 카다안(합단)의 도적떼 무리들과 싸운 전투임

그런데 여기에서 충렬왕이 보여준 행동들은 정말 졸렬하기 그지 없는 행동들이였음

먼저 충렬왕이 이런 말을 함

民惟邦本, 予豈先避以撓民心? 賊雖長驅而至, 予爲三軍之殿, 以全社稷.

해석 :

<백성은 곧 나라의 근본인데 과인이 어찌 먼저 피난하여 민심을 혼란시키겠는가?

적이 비록 이긴 기세를 타고 여기까지 쳐들어올지라도 과인은 삼군의 후군(後軍)이 되어 사직(社稷)을 보전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해 놓고 충렬왕은 강화도로 도망쳐 버림

원나라 구원병들을 요청해 놓고 그냥 강화도로 튀어버리는 왕

하여튼 그래서 원나라에서 이런 답면을 함

元遣平章事闍梨帖木兒來 助討哈丹 闍梨帖木兒遣人來告曰 國王宜留京城 以犒吾軍

해석:

<원나라에서 평장사 토리티무르를 보내 카다안을 토벌하는 일을 돕게 하였는데 토리티무르가 사람을 보내 말하길 "고려 왕은 수도에 머물며 우리 군사를 도와주어야 한다." 고 말했다.>

이런 말을 했는데도 충렬왕은 생까고 강화도로 퉈어비림

자 그리고 원나라 구원병들이 왔는데 충렬왕이 안심을 했는지 구원병들에게 연회, 잔치를 베품

그런데 원나라 구원병들이 충렬왕한테 꾸짖음

이렇게

<왕이 원나라 군대를 남도(藍島) 북교(北郊)에 나가 맞이하고 하서국왕(河西國王)•경중군왕(慶重郡王)•세도칸, 토리티무르, 평장(平章) 타추, 우승(右丞) 바이티무르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세도칸이 왕에게,

“지금 강남(江南)에서 운송해오는 군량이 아직 도착하지 못했는데, 만약 적과 전투 중에 양식이 떨어지면 어찌하겠습니까?”

하고는 또 찬성사(贊成事) 홍자번(洪子藩)더러,

“당신은 상국(相國)으로 있으면서 국가 재정에 관한 일은 환히 알고 있을 터이니 필요할 때에는 반드시 지급해야 할거요.” 라고 윽박질렀다.

왕이 난감해 하면서, “내고(內庫)에 비축해 둔 것으로 지급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무마시켰다.>

- <고려사> 충렬왕 17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사들한테 먹일 군량미도 없는데 충렬왕은 잔치나 벌리고 있음

한마디로 놀자판

그런데 이런 말은 충렬왕이 해야 하는데 번대로 원나라 구원병들이 하고 잡빠졌음

그리고 원나라 구원병들이 또 이런 말을 함

<무자일.

왕이 나이만다이 대왕(大王)과 타추 원수(元帥)를 산예(狻猊)에서 맞이하고 잔치를 베풀어 위로했다.

나이만다이가 왕에게, “왕께서도 친히 나가 적을 막는게 어떨까요?” 라고 권유했으나 왕이늙고 병들어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나이만다이가,

“적이 방 안까지 쳐들어왔는데 늙고 병들었다고 혼자 편안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힐난했으나 왕은 대꾸하지 않았다.

기축일.

왕이 선원사(禪源寺)로 돌아오자 나이만다이가 사람을 보내 왕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했다.

“어제는 외람되게도 왕림해서 저희들을 위로해 주셨으니 참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마는, 다만 적을 어떻게 막을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버리셨으니 저는 실로 당혹스럽습니다.

이웃집에 불이 나도 쫓아가 구원하는 것이 마땅한 법인데 하물며 자기 집의 일인데 어찌 앉아서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충렬왕은 그냥 얼굴에 철판을 깔은 왕임

하여튼 원나라 구원병들이 카다안(합단)과 싸우고 있는 상황헤서도 충렬왕은 강화도에서 술 파티만 벌였음

한마디로 백성들이 죽던지 말던지 내 알바 아니다 이것임

즉 나는 그냥 술 마시고 놀거다 이것임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원나라 구원병들이 카다안(합단)을 다 물리치고 난 후 충렬왕이 이런 말을 함

"이제 과인이 직접 적을 토벌할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따 몸이 아프다, 늙었다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하던 충렬왕이 전투가 다 끝나자 이제와서 저런 말을 함

원나라 구원병들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음??

하여튼 충렬왕이 원나라 구원병들이 카다안(합단)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개경으로 환궁해서 또 연회, 잔치를 베풀려고 하자 원나라 구원병들이 이런 행동을 했음

<계해일.

왕이 개경(開京)으로 돌아오자 세도칸이 공주를 알현하고 사로잡은 적도 남녀 5십 명과 좋은 말 다섯 필을 바쳤다.

세도칸의 군령이 엄격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두려워한 나머지 통과하는 지역마다 추호도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탈취하는 일이 없었다.

적이 연기(燕岐)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밤을 낮 삼아 행군해 불의의 기습을 가함으로써 두 번 다 적을 대파한 것은 모두 그의 힘이었다.

을축일.

세도칸이 원나라로 귀환하려 하자 왕이 그를 맞아다가 잔치를 베풀려고 했지만 세도칸은, 명령을 받고 일을 마쳤으니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즉시 귀국길에 올랐다.

병인일.

나이만다이등이 모두 귀환했다.>

원나라 정수들이 정말 쿨 가이들이고 이래서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했는건지 모름


자 여기서 우린 무얼 깨달을 수가 있음?? 은 각자 생각해 보길

참고로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전투민족이였던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훈족(흉노족) 가야 부여 진국 삼한 금나라 청나라 그리고 아메노 히보코(이즈모) 포함)는 저런 적 없음

신라는 당한만큼 몇십배 몇백배 복수를 해 앙갚음을 하는 왕조였음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 로마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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