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ugust 16, 2021

중국사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고구려가 이긴 전쟁이 아니다 - 2탄 (feat. <삼국사기> 보장왕 편)

[중국 북조 선비족 고구려는 운이 좋았다 (feat. 수나라 양현감의 난과 고구려가 수나라에 항복을 청하다 (feat.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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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 613년 04월(음) )

여름 4월에 황제의 행차가 요하를 건너와서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 을 보내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 진군하여 신성(新城)에 이르자, 우리 병력 수만이 대항하여 싸웠다.

왕인공이 날쌘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였다.

아군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허락하였다.

비루(飛樓)·충자(橦)운제(雲梯)·지도(地道)로 네 방면에서 함께 진격하고 밤낮을 쉬지 않았다.

우리가 상황이 변하는 데 따라 막으니 20여 일에도 공략하지 못하고 아군과 적군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衝梯) 장대의 길이가 15장(丈)이었는데, 효과(驍果) 심광(沈光)이 그 끝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면서 아군과 싸워 짧은 병기로 맞붙어 십수 명을 죽였다.

아군이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떨어뜨리니 땅에 닿기 전에 마침 장대에 달린 줄이 있어 심광(沈光)이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 의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베 주머니 백여 만 개를 만들어 보내 흙을 가득 채워 그것을 쌓아올려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드는데, 넓이는 30보, 높이는 성과 같게 하여 전사들이 올라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또 팔륜루거(八輪樓車)를 만들어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보며 쏘게 하였다.

기일을 정해 장차 공격하려고 하므로, 성 안이 매우 위태롭고 긴박하였다.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글이 도착했다.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고, 또 고관의 자제들이 모두 양현감의 처소에 있음을 듣고 더욱 걱정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평소에 양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불안하여 도망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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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 613년 04월(음) ) 

황제가 밤에 비밀리에 여러 장수를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기계•공격도구들이 산처럼 쌓였고, 군영의 보루와 장막은 평온하게 움직이지 않았으나, 무리의 마음은 두렵고 염려가 되어 다시 부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아군은 즉시 이를 알아차렸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단지 성안에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다음날 오시(午時)가 되어서야 바야흐로 점차 밖으로 나갔으나, 수(隋)의 군대가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경과해서야 비로소 수천 병력을 내어 쫓았으나, 수의 군대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늘 8,90리의 거리를 유지하였다. 

요수(遼水)에 도달할 즈음에 황제의 진영이 다 건넌 것을 알고는 그제야 감히 후군에 가까이 갔다. 

이때 후군도 수만 명이었는데 아군이 따라가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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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제가 또 고구려 정벌을 명하다 ( 614년 02월(음) ) 

25년(614) 봄 2월에 황제가 전체 신료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할 일을 의논하게 하였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록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병사들을 다시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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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을 청하다 ( 614년 07월(음) ) 

가을 7월에 황제의 수레가 회원진(懷遠鎭)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천하가 이미 소란스러워 징발된 병사들이 정한 날짜를 어기고 도착하지 않은 자가 많았고, 우리 나라 또한 어렵고 궁핍하여 있었다. 

내호아(來護兒)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 병력이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가 이를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그에 따라 곡사정을 돌려보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사지절(使持節)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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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 614년 08월(음) ) 

8월에 황제가 회원진에서 군대를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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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다시 침략해오지 못하다 ( 614년 10월(음) ) 

겨울 10월에 황제가 서경(西京)에 돌아와서 우리 사신과 곡사정을 대묘(大廟)에 알리고, 곧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장수들에게 명하여 장비를 엄하게 하고 다시 후에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으나 마침내 실현하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영양왕 조


참고로 수나라 양제는 폭군이였음

그래서 양제가 집권하는 동안 민란이 무려 120여건이나 일어났음.


중국사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고구려가 이긴 전쟁이 아니다 - 1탄 (feat.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때 중국사인 고구려는 운이 좋았다 (feat. 수나라 양현감의 난 그리고 고구려가 수나라에 항복을 청하고 속죄를 하다(feat.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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煬帝(양제)가 帝位(제위)를 이어 받으매 天下(천하)가 전성하여, 高昌[國]王(고창국왕)과 突厥(돌궐)의 啓人可汗(계인가한)이 친히 대궐에 나아와 朝貢(조공)을 바쳤다. 

이때 元(원 - 고구려 영양왕)에게 入朝(입조)케 하니, 元(원 - 영양왕)이 두려워하여 자못 藩臣(번신)의 예절을 소홀히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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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대업)] 9년(A.D.613; 高句麗 嬰陽王(고구려 영양왕) 24) 에 [煬]帝(양제)가 다시 親征(친정)하였다. 

이때는 諸軍(제국)에게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勑旨(칙지)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城(성)을 공격하니,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이 무렵 楊玄感(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反書(반서)가 도착되자, [煬]帝(양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로 六軍(6군)을 이끌고 돌아 왔다. 

[이때] 兵部侍郞 斛斯政(병부시랑 곡사정)이 高[句]麗(고구려)로 망명하여 들어가니, 高[句]麗(고구려)가 정보를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추격을 가하여 후속의 부대는 대부분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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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대업)]10년(A.D.614; 高句麗 嬰陽王(고구려 영양왕) 25) 에 또 다시 天下(천하)의 군사를 징벌하였으나, 때마침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인민이 流亡(유망)하고, 곳곳마다 교통이 두절되어 군사가 대개 期限(기한)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 

遼水(요수)에 이르자, 高[句]麗(고구려)도 피폐되어졌기 때문에 使臣(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는 동시에 斛斯政(곡사정)을 압송하여 속죄하였다. 

[煬]帝(양제)는 이를 허락하고 懷遠鎭(회원진)에 주둔하면서 降款(항관 – 항복하여 성심을 다함)을 접수하였다. 

아울러 포로와 노획한 軍器(군기)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煬帝(양제)는] 京師(경사)에 이르러 高[句]麗(고구려)의 使者(사자)로 하여금 친히 太廟(태묘)에 告(고)하도록 한 뒤 억류시켰다. 

이어서 元(원 – 영양왕)을 불러 들여 入朝(입조)토록 하였으나, 元(원)이 끝내 오지 않았다. 

[煬]帝(양제)는 諸軍(제군)을 엄중히 정비하여 다시 토벌할 것을 꾀하였으나, 마침 天下(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걸국 시행하지 못하였다. 

- <수서> 동이열전 중국 북조 선비족 고구려


참고로 수나라 양제는 폭군이였음

그래서 양제가 집권하는 동안 민란이 무려 120여건이나 일어났음.


Tuesday, August 10, 2021

전라왜구 임나에 대한 우리나라 뉴스들의 거짓말 즉 역사 왜곡을 한번 보기로 하자

[단독]30년 만에 임나일본부 망령서 벗어난 신덕 고분 (2021-08-10)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10810/108471668/1

“함평 신덕 1호분 왜인 아닌 지역수장 무덤 가능성 높아”

30년 미공개 발굴조사 결과 이달 말 발표

임나일본부설에 이용될 우려로 인해 30년간 공개되지 않은 삼국시대 ‘신덕 1호분’ 발굴조사 결과가 이달 말 발표된다.

동아일보가 미리 입수한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고분 출토 유물에서는 백제와 왜(倭)의 문화가 혼재된 양상이 확인됐다.

조사 결과를 분석한 한일 고고학자들은 20,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의 주인이 지역 수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한반도에 진출한 왜인이 묻혔을 것으로 보는 임나일본부설의 시각과 배치되는 것이다.


함평 신덕고분 발굴 30년만에 보고서…"주인은 여전히 미궁" (2021.08.10 11)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21/08/773520/

국립광주박물관 발간…1호분에 왜·백제·토착 세력 영향 혼재

한때 `임나일본부설` 근거 우려도…"학계 논의 활발해지길"

(중략)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보고서에서 신덕 1호분에 대해 "무덤 형태와 매장시설로 보면 왜 규슈 세력과 관계가 깊은 상황에서 축조됐지만,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에서는 백제 영향도 확인된다"면서 무덤 주변 도랑 형태, 돌 뚜껑을 덮은 무덤길의 항아리 등을 근거로 현지 토착 세력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 1호분에서 나온 마구 세트, 구슬과 시신 안치 방식은 백제계 속성이지만, 관과 삼각형 철모는 왜와 백제 요소가 섞여 있다고 설명했다.

또 신덕 1호분에서 발견된 구슬이 피장자 위계가 상당히 높았음을 알려주는 유물로 백제를 통해 입수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목관 재질은 무령왕릉과 같은 일본 특산 나무인 금송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현재 호남 지역 전방후원분은 12곳에 14기가 산재한다고 알려졌으며, 축조 시기는 모두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으로 짐작된다.

(후략)

<-- 우리나라 학자들의 거짓말이 하늘을 찌른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도 전라왜구 임나의 실체가 다 나오며 중국사인 고구려 호태왕이비에도 전라도 왜국 즉 전라왜구 임나가 다 나온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수두룩하게 발견이 되어지고 있는 일본식 무덤들이 고구려 신라의 무덤들과 맘먹거나 크며 백제의 무덤들은 고구려 신라 전라왜구 임나의 무덤들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다

이런데 이게 용병? 의 무덤들과 왜국의 신하 나라이자 중국사인 백제에 파견된 사람의 무덤들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이 무덤들이 백제의 무덤들보다 훨씬 클까?

하여간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일본왕은 중국인이다(feat.오태백과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문신 풍습)

[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