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23, 2020

전라도 왜국 즉 임나 지역에서 발견 된 목간의 글씨체들이 왕희지체였다(feat. 중국 남조 왕조들)

나주 복암리서 백제 제철소 유적·木簡 발굴 (2008.07.24)

<왕희지체 명필…‘인력관리 체계담겨

6~7
세기 지방문서행정밝힐 자료>


먼저 중국사인 백제라고 하는데 전라도 전남 나주지역은 백제 지역이 아나라 전라도 왜국 즉 임나 지역이였음

그리고 왕희지체를 만든 왕희지는 이런 사람임

<
왕희지 (303~361) - 동진의 정치가이자 시인, 서에가이다>

이 사람은 동진(317~420) 시대 때 사람임

그런데 이 동진 사람의 서체들 즉 중국 서체들이 전라도 왜국 즉 임나 지역과 백제 지역에서 자꾸 발견이 된다는 소리는 뭘까?

즉 전라도 왜국 즉 임나와 백제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건너 온 것일까?

당연히 중국 남조 지역에서 건너 온 사람들임

4
세기때 중국의 크고 작은 전쟁들과 난들로 인해서

팔왕의 난, 영가의 난, 비수대전등

특히 "영가의 난" 때 엄청나게 많은 중국 남조 지역 사람들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넘어왔다라고 볼 수 밖에 없음

중국 남조에 살던 짬뽕들 - 오스트로네시아인들 즉 백월 민족들과 중국 한족들


왕희지체를 구사한 백제 목간(2008-07-24)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만 통역을 거쳐야지만 중국과 대화가 통했다라는 내용이 중국 문헌인 <양서> 에 나옴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jo&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o_008r_0010_0040_0030&position=-1

(중략)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梁書東夷列傳  新羅 

(중략) 文字(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 <양서> 동이열전 신라


자 저렇게 나온다

그리고 중국 문헌들인 삼국지, 후한서에 보면 삼한 특히 마한도 통역을 거쳐야지만 중국과 말이 통한다라고 나옴

그러나 중국사들인 고구려 백제는 그런 기록들 전혀 없음

양나라 <양직공도> 에 보면 고구려 백제는 옛 중국 하나라 말 즉 중국어를 쓴다라고 나와있음


중국사인 고구려의 최대 굴욕 사건이 <북사> 에 나오는데...(feat. 양원왕과 북제 사신인 최유)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jo&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o_012r_0010_0010_0220&position=-1

天保三年(552), 文宣至營州, 使博陵 崔柳使于高麗, 求魏末流人. 敕柳曰: 「若不從者, 以便宜從事.」 及至, 不見許. 柳張目叱之, 拳擊成墜於牀下, 成左右雀息不敢動, 乃謝服, 柳以五千戶反命. 成死, 子湯立.

- <北史> 列傳  高句麗

해석 :

天保(천보) 3(A.D.552; 高句麗(고구려) 陽原王(양원왕) 8) 에 文宣[](문선제)는 營州(영주)에 이르러, 搏陵(박릉) 崔柳(최유)를 高麗(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魏()나라 末() [高句麗(고구려)]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케 하면서, [](최유)에게 詔(조칙)하기를,

[高句麗(고구려)]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

고 하였다.

[高句麗(고구려)] 이르러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成(-양원왕)을 쳐 龍床(용상) 밑으로 떨어 뜨렸다.

()의 좌우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유) 5천戶()를 돌려 받아 復命(복명)하였다.

()이 死()하고 아들 湯(-평원왕)이 즉위하였다.

- <북사> 열전 고구려


중국 북제 사신한테 맞아서 용상에서 떨어졌다라..

대단하군

그런데 이런 일화가 허울뿐이였던 고려 시대때도 비슷한 일화가 있음

바로 고려의 최고 막장 왕이였던 충혜왕때 일임

그건 다음에 한번 보기로 하고

하여간 저런 내용이 중국 문헌인 <북사> 에 나옴

중국사인 고구려가 망하고 8살에 당에 끌려가 노비와 내시가 된 고구려 왕손

[단독]8살에 당에 끌려가 노비와 내시가 된 고구려 왕손 (2020-04-12)


위의 뉴스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
중국서 고구려 영류왕 후손 고연복의 묘지명 확인

영류왕 세자 고환권의 증손 추정

세도가 노비황궁 내시된 기구한 인생

지난해 중국 학술지에 묘지명 관련 논문 나와

안정준 교수가 최근 입수요약해 공개

당 현종 정변 도운 환관 고력사 양자로 들여

말년엔 최고 환관 자리 올라 영화 누리다 사망]


<
이렇게 기구한 삶이 다시 있을까.

고구려 왕세자의 증손자는 668년 나라가 망하자 8살 나이에 당나라에 끌려갔다.

한 권세가 집안의 노비로 전락해 종살이를 했다.

그 뒤 거세를 당하고 당 황궁에 들어가 내시(환관)로 일해야 했다.

황궁에서 처신을 잘한 덕분에 말년엔 환관 최고 직위에 올랐다.

유년시절 이산과 노비의 삶을 겪다 내시의 우두머리가 되어 눈을 감은 옛 고구려 왕족.

그의 이름은 고연복(高延福, 661?~723)이다.

(
중략)

묘지명에서 우선 주목되는 대목은 고연복의 집안 내력이다.

지문을 보면, 무덤주인의 이름은 복()이고, ()는 연복(延福), 출신은 발해인(渤海人)으로 표기되었다.

발해는 발해군(勃海郡)의 다른 이름으로, 허베이성(河北省) 창저우(滄州)시 남동쪽에 있던 한나라 이래의 군 이름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멸망 뒤 끌려온 보장왕의 손자 고진(高震)과 증손인 고씨부인(高氏夫人)의 묘지명에도 각각발해인으로 출신지를 표기한 전례가 있다.

따라서 같은 왕족의 후손을 표방한 고연복이 자기 가문을 발해군에서 기원한 것으로 적은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게 안 교수의 해석이다.

오래전 발견돼 국내 학계에도 알려진 고연복의 비석문당고고내시비(唐故高內侍碑)’ 기록에도 고구려 정벌 뒤 나라 잃은 왕의 족속으로서 환관 직을 맡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묘지명과 비문 내용을 종합하면 고연복은 본래 고구려 왕실 출신으로서, 멸망 뒤 당에 들어와 환관이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중략)

고연복이 당에 끌려간 시점에 대해서도 논문을 쓴 중국 학자들은 668 9 21일 당의 동도행군총관이던 장군 이적(李勣)이 평양성을 함락시킨 뒤 보장왕과 그의 아들 복남(福男), 덕남(德男)과 대신 등 20만여 명을 당에 끌고 간 기록을 일종의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8살 왕족 고연복 또한 다수의 고구려 지배층이 끌려간 행렬에 포함되었을 것이란 추정이었다.

고연복이 끌려간 뒤 환관이 되기까지의 행적은 당나라 사서인 <구당서>고력사전에 나온다.

양부인 고연복이 입궁 전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武三思) 집안에서 노비로 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에 끌려간 고구려 주민들이 노비가 된 사례는 기록상 적지 않았다.

왕족 고연복이 어떤 이유로 노비가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무삼사는 고연복을 부리다가 황궁에 바쳐 거세시키고 환관으로 만들었다.

고연복은 고종부터 현종 대까지 여러 황제를 받들었다.

하지만, 무삼사가 그를 입궁시켜 환관으로 만든 사실은 후대의 묘지명에 기록되지 않았다.

무삼사는 측천무후가 물러난 뒤 황제 후계 문제를 놓고 암투를 벌이다 살해됐다.

동조세력이던 위황후, 안락공주 일파도 훗날 현종이 된 이융기의 정변 때 처형됐다.

이런 변고들로 그들의 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뒤 묘지석이 새겨졌으므로 무삼사의 행적은 당연히 넣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중국 학자들은 추정했다.

(후략)>


중국 북조 선비족 고구려의 왕손 후손이 8살때 당나라로 끌려가서 노비로 살다가 거시기를 강제로 잘려서 내시가 되었다는 묘지명이 중국에서 발견이 되어졌음

그 당시 중국사들인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중국에 끌려가서 엄청나게 맞아 죽는 경우가 많았음

하여간 중국의 지방정권이자 중국 괴뢰국이였던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의 묘지명들이 조금씩 조금씩 발견이 되면서 고구려 백제는 더욱 더 중국사가 되고 있는 상태임


그리고 하나 이목을 끄는 대목이 있음

[발해는 발해군(勃海郡)의 다른 이름으로허베이성(河北省창저우(滄州)시 남동쪽에 있던 한나라 이래의 군 이름이다.]

<-- 바로 이 대목임

그렇다

"발해" 라는 말은 한나라때부터 있던 말임

자 그러면 대진국 즉 발해는 한민족 역사인가??

아니다

발해는 한나라때의 군 이름이였음

고로 대진국 즉 발해는 중국 지방정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음


일본왕은 중국인이다(feat.오태백과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문신 풍습)

[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