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October 1, 2019

중국 문헌인 <수서> 에 나온 왜인들의 성격 품성 특징등과 일본의 깨끗한 거리를 한번 살짝 알아보자

<중국 문헌인 <수서> 에 나온 왜인들(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의 성격 품성 특징등을 한번 살짝 알아보자>

(중략)

人頗恬靜

사람들은 성격이 매우 얌전(조용)하다.


罕爭訟

남과 다투는 일이 드물다.


少盜賊

도적이 적다.


樂有五弦琴笛

악기로는 다섯 줄 악기(), 피리(등이 있다.


男女多黥臂點面文身

사내와 계집들 가운데는 팔에 먹을 새기거나 얼굴에 점을 박거나 몸에 문신을 파는 자들이 많다.


(중략)


性質直

성질이 곧다.


有雅風

풍속이 아름답다.


女多男少

계집이 많고 사내가 적다.


(중략)


婦人不淫妒


여자들은 음탕하지 않고 시샘도 하지 않는다.


(후략)


- <수서(隋書)> 왜국전(倭國傳)


자 저렇다

제 3자 의 눈으로 보는게 가장 정확하다

하여간 중국도 저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깨끗한 거리들을 한번 살짝 보자


교토 가와라마치 역

교토의 어느 거리




신요코하마 어느 거리의 프랑스 음식점

신요코하마의 어느 거리



자 일본은 어딜가는지 간에 거리들이 개끗하고 포장들도 아주 잘 되어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 온 서양 관광객들도 일본의 거리가 너무나 깨끗해서 휴지 담배꽁초등을 버릴 생각이 잘 나지 안든다

그러나 중국인들과 우리나라 사람들과 동남아인들은 버린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가서도 샌다는게 딱 맞다

Saturday, September 21, 2019

일본과 전라도가 대한민국과 경상도와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 2탄

<짱개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이 세운 전라왜구+큐슈왜구놈들이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가 임나 관가(전라왜구)를 명말시킨데 격분해서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와 또 합세를 해 신라를 쳐들어 왔지만 또 다시 대패>

그리고 난 후의 일화들....

백제(百濟)와 함께 신라(新羅) 를 공격하였으나 패배 ( 562 07() )

<.... (중략) 鬪將自就營中 悉生虜河邊臣瓊缶等 及其隨婦 于時 父子夫婦 不能相恤 鬪將問河邊臣曰 汝命與婦 孰與尤愛 答曰 何愛一女 以取禍乎 如何不過命也 遂許爲妾 鬪將遂於露地 姦其婦女 婦女後還 河邊臣欲就談之 婦人甚以慙恨 而不隨曰 昔君輕賣妾身 今何面目以相遇 遂不肯言 是婦人者 坂本臣女 曰甘美媛 同時所虜 調吉士伊企儺 爲人勇烈 終不降服 新羅鬪將 拔刀欲斬 逼而脫褌 追令以尻臀向日本 大號叫叫也曰 日本將 嚙我臗脽 卽號叫曰 新羅王 臗脽 雖被苦逼 尙如前叫 由是見殺 其子舅子 亦抱其父而死.... (후략)>

--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긴메이 천황) 23


해석 :

<... (중략) 신라 장군이 스스로 군영에 나아가 河邊臣瓊缶(하변신경부- 카와베노오미 니에) 등과 그를 따라왔던 부인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 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장군이 河邊臣(하변신- 카와베노오미 니에)에게너의 목숨과 부인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아끼는가라고 묻자어찌하여 한 여자를 아껴 화를 취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라 대답하고 첩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은 마침내 벌판에서 그 여자를 간음하였다.

여자가 후에 돌아가니, 河邊臣(하변신- 카와베노오미 니에)이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옛날에 당신이 저의 몸을 가볍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로 만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승락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坂本臣(판본신-사카모토 오미)의 딸인데 이름을 甘美媛(감미원-우마시 히메이)라 한다.

함께 사로잡혔던 調吉士伊企儺(주길사이기나-쯔키노이키나) 은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잠뱅이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일본으로 향하게 하고일본 장군은 내 엉덩이를 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 부르짖는다(() 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소리쳤다.

비록 고통과 핍박(고문)을 받았으나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舅子(구자-오지꼬) 역시 그의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후략)>

--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긴메이 천황) 23


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이 세운 전라왜구+큐슈왜구와 중국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 가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한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짐

그리고 신라 장수들이 왜놈(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왜국)들과 중국 한족놈(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들 의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희롱하고 죽이고 했음

참고로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는 상대편과 싸울때 무조건 전부 몰살하는게 원칙이였음 -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 다 나옴

왜냐면?? 상대편이 아에 보복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임

하여간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

역시 한민족 최고의 전투민족은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훈족(흉노족) 가야 부여 진국 삼한 금나라 청나라 그리고 아메노 히보코(이즈모) 포함) 밖에 없음

Thursday, July 18, 2019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 의 "쿠다라" 는 정말로 "큰 나라" 라는 뜻일까?? (Feat. 쿠다라 나이, 사무라이 어원들)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만 열었다고 하면 거짓말, 통수, 사기, 위증, 선동, 역사왜곡등을 하는 나라임


자 그럼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쿠다라가 정말로 큰 나라라는 뜻일까??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쿠나라" 는 "큰 나라" 라는 뜻이 아님


자 그럼 쿠다라의 어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살짝 한번 알아보자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구다라) 의 쿠다라

그 쿠다라는 큰 나라 라는 뜻이 아니라 구드래(부여쪽 금강 나루)” 혹은 웅진을고마나라()” 구마나리 등으로 불렀는데 여기에서 유래되어졌음

즉 중국 문헌들에 보면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 의 도읍이 "고마(固麻)" 라고 되어있고 일본서기와 일본의 다른 문헌들에서는 고마나라 혹은 고마나루(固麻那羅), 구마나리 혹은 고마나리(久麻那利)” 되어있음

즉 쿠다라는 여기에서 유래되어진 어원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쿠다라 나이(らない)" 라는 일본 말을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 것이 아니면 하찮다 라고 해석하고 있움

참 대단함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은 알아보지도 않고 막 주장함

고대 일본에서는 를 썼지 ない)” 나이 를 안썼음

ない)” 나이 를 쓴 시기가 바로 에도 시대(1603~1868) 때 일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사무라이는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 의 싸울아비?? 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어원도 거기에서 나온 말이 아님

일본의 귀족들이 서로서로 싸울때 보디가드가 필요했는데 이 보디가드를 ()” 로 불렀음

시중들다, 모시다 여기서 나온 말임

그리고 사무라이라는 말은 16세기 쯤에 나온 말임

참고로 싸울아비라는 어원이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에서 쓰였다는 기록들은 전혀 없음

이 싸울아비라는 말은 근대(1960년도때)에 쓰인 말임


결론 : 국수주의는 빙이고 사고는 항상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게 생각하고 판단을 해야 함


번외 :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는 짱개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왜국의 쫄따구 나라였음

왜냐면??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 보면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가 짱개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왜국(전라왜구+큐슈왜구)에 매해 수시로 왕자들을 볼모로 보냈고 조공을 바쳤음

그러나 한중일 기록들이에 그 반대로 되어진 기록들은 거의 전혀 없음

그리고 이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와 짱개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전라왜+큐슈왜구의 대빵은 짱개 남조 왕조들이였음 <-- 중국 문헌들에 다 나옴

즉 이 두 나라는 짱개 남조 왕조들의 쫄따구 나라들이였다는 것임

왜냐면?? 이 두 나라가 중국의 전쟁들과 난들을 피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이주한 집단들이기 때문임

다시 말해서 중국 남조에서 넘어 온 짬봉들이라는 소리암

짬봉들 오스트로네시아인들(동남이인들)+짱개 한족 혼혈인들 그리고 짱개 한족들등

Tuesday, July 16, 2019

이순신의 명량해전은 정말로 이긴 전투일까?? 그리고 대첩일까?? (feat. 명량해전은 진 전투다)

요즘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해 중국 이민자 후손인 문 정권이 뜬금없이 이순신의 "명량해전" 을 들먹였음

자 그런데 명량해전은 정말로?? 이긴 전투일까??

이건 예전에 한번 여기에 썼는데 다시 한번 상기를 해 보는 의미에서 이걸 다시 한번 보기로 하자


<명량해전의 양측 기록들>


[명량해전은 1597 9 16일에 일본 해군과 조선 해군과의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한국에서는 명량 대첩으로 불리며 이순신이 이끄는 소수의 조선 해군이 다수의 일본 해군을 격파시킨 전투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순신의 해군이 일본 해군의 선봉 부대를 격파시켰으나 해상권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멀리 후퇴했다.


명량해전 경과 :

이순신 해군이 열세였기 때문에 명량도로 물러났다.

이곳은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조류가 빠르고 큰 소용돌이 치고 있는 지역이다.

일본 해군 수십 척(조선 측 기록에서는 130여척 혹은 133)이 명량도로 향했다.

다른 전함은 뒤로 빠지고 그(이순신의 함대)가 탄 배 한 척만 일본 해군과 싸웠다.

이 싸움에서 일본해군 제독인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했다.

이순신이 의연히 싸우자 뒤로 빠졌던 조선의 전함들이 나서 참전했다.

치열한 전투 중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하고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떨어졌다.

도도 마고하치로와 도도 카게유가 조선 해군을 물리치고 모리 다카마사를 구조했다.

이 해전에서 조선 해군의 손해는 경미했으나 중과부적이라 퇴각했다.

일본 해군은 생소한 수로로 인해 조선 해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다음날에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전날의 전장을 둘러보았다.

이때 이순신 해군은 그곳에서 머나먼 외도(신안군 지도읍)에 있었다.

명량해전 이전에 충청도까지 진출했던 일본육군이 그 해전 후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들이 전라도 서해안을 제압시키자 이순신 해군이 북쪽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제대로 된 반격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9 19일에는 영광군 앞바다로, 9 21일에는 군산 앞바다로 후퇴했다.

일본 해군은 명량 해전 다음 날에 조선 해군의 근거지인 진도를 점령했다.

그 다음 날에 전라남도 서해안 지역에 진출했다.

이곳에서 육군과 만났다.

일본 육군과 해군이 전라도 전역의 소탕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일본 해군이 명량을 떠난 후인 10 8일에야 이순신 해군이 그곳으로 귀환했다.

본래 근거지는 파괴된 관계로 고금 섬(완도군 고금면)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이순신 해군이 재건하는 데에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명량해전 평가 :

일본 해군의 선봉대를 격파시킨 이순신 해군이 전라도 북단으로 철수하고 일본 해군은 그의 근거지를 점령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전략적으로 볼 때 명량해전은 일본 해군이 승리한 전투였다.

현대 한국에서는 명량해전을 "일본에 대승한 해전"으로 선전하고 있다.

일본 해군의 참가 병력이 군선 133운송선 200척이고 손실이 침몰 31대파 92전사 8000~9000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본조선 양편의 사료를 하나도 보지 않고 하는 소리이다.

그때 일본 해군의 전체 수효는 도도 다카토라(2,800), 가토 요시아키(2,400), 와키자카 야스하루 (1,200), 구루시마 미치후사(600), 간 미치나가(200) 모두를 합해도 8,000 명이 못되었다.

명량해전에서는 대형 선박인 아타케부네(安宅船)를 쓰지 않고 중형 선박인 세키부네(만 썼다.

이순신 자신이 저술한 "난중일기"에만 의거해도, ‘당파라고 했지 ‘격침시켰다고는 하지 않았다.

일본 측의 전사자 수효는 아예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일본 측의 기록은 차치하고 조선 측 기록(이순신 자신의 기술과 다른 사료)에만 의거해도 명량전투는 조선 해군 12~14척이 일본 전함 30척 혹은 31척을 공격한 후 후퇴한 전투였다.

한국에서 명량해전 전말은 역사 교과서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일본해군을 궤멸시켜그들의 침공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명량해전 후에 북쪽으로 퇴각했고 이에 일본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당시 이순신이 전장으로부터 이탈도주하여 일본해군이 무혈로 서해안에 진출했다.

따라서 그가 문책당해야만 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조선 정부도 느끼고 있었음은 조선 측 기록을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 
조선 정부가 명량에서 승리?? 거둔 이순신에게 아무런 포상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승리한 해전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볼때 일본해군의 승리였음]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작은 승리" 라고 나옴

그러나 이걸 믿어야 할까??

이순신 난중일기에서는 승리?? 라는 말은 나오지도 안는데 말이지

그리고  <난중일기> 에 나오는 명량해전의 전투 내용에는 작은 배 세키부네 31척을 당파하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도망을 쳤다라고 나옴

이것으로 일본군이 서해안에 진입을 못하고 많은 수가 죽었다라고 선조한테 보고를 했는데 난중일기에는 일본군 죽은 수가 전혀 나오지도 않고 이순신 바램과는 달리 일본군은 다음날 바로 서해안에 입성을 함

이순신의 부산 방화 사건 거짓 징계와 정유재란 발발 전 막으라고 했던 가토의 적은 수의 병력을 간만 보고 무사통과시켜 준 이순신을 선조가 과연 믿었을까??


일본측에서는 "일본군의 승리"

왜냐면?? 이순신이 작은 중형배인 세키부네 31척만 당파를 하고 북쪽으로 계속해서 후퇴 도망치는 바람에 다음 날에 진도를 입성을 해 진도를 초토화 시켰으며 그 다음날에 서해안에 입성을 해 전라도 전역을 초토화 시켰기 때문임


중국측 기록에서는 명량해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않나옴


그리고 패한 전투인 명량해전을 우리나라에서는 명량 대첩?? 이라고 하는데 대첩이면 아주 크게 이긴 전투인데 왜?? 이순신의 함정들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후퇴 도망을 쳤을까??

한마디로 대첩?? 도 아닌데 우리나라에서 뻥을 쳤던 것임


자 그러면 패한 전투인 명량해전 다음에 일어난 울산성 1 2차 전투순천 왜교성 전투사천성 전투등은 어떻해 되었을까??

그리고 정유재란(게이초노에키발발전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의 적은 병력을 무사통과 시켜 주는 바람에 전라도 지역이 어떻해 되었을까??

그리고 임진왜란(분로쿠노에키발발전 이순신이 참전한 녹둔도 참변 혹은 전투에서는 어떻해 되었을까??


그리고 명량해전에 대한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들과 다른 역사책들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음

 우리나라에서는 패한 전투인 명량해전에서 일본놈들의 죽은 수를 이렇게 써 놓았음

<일본 해군의 참가 병력이 군선 133운송선 200척이고 손실이 침몰 31대파 92전사 8000~9000

혹은

전선 100여척이상 완파이외 전선 다수 파괴도도 다카토라 부상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칸 마타시로 마사케가 전사최소 8000여 명 전사 추정>

<-- 이렇게 말이지

그런데 정사(초판)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에 이 내용들이 나올까?? 는 각자 한번 찾아보길

참고로 여기서는 일본측 기록은 뺐음

일본왕은 중국인이다(feat.오태백과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문신 풍습)

[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