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8, 2021

백제는 중국사다 (feat. 중국 양나라의 "후경의 난" 때 통곡을 한 백제 사신들과 양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요청한 백제 - <양서>)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일어난 후경의 난(侯景--548)

이 후경의 난을 본 백제(쿠다라) 사신들이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내용이 <양서> 에 나오는 내용과 양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요청을 한 백제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이 내용을 한번 보기로 하자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jo&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o_008r_0010_0030_0050&position=-1

中大通六年(534)•大同七年(541), 累遣使獻方物; 幷請涅盤等經義毛詩博士, 幷工匠畫師等, 敕並給之. 太淸三年, 不知京師寇賊, 猶遣使貢獻; 旣至, 見城闕荒毁, 並號慟涕泣. 侯景怒, 囚執之, 及景平, 方得還國.

- <梁書東夷列傳 百濟 中大通 6


해석 :

[中大通(중대통) 6(534)과 大同(대동) 7(541) 에 거푸(자주 혹은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涅盤經(열반경) 등에 대한 義疏(의소책의 뜻을 풀이함 혹은 문자의 뜻을 해명함)와 毛詩博士(모시박사) 및 工匠畫師(공장화사) 등을 구하므로모두 공급하여 주도록 詔敕(조칙) 하였다.” (혹은 모두 공급하여 주었다.)

太淸(태청) 3(549)에 京師(경사 - 양나라 수도)가 적에게 침범당한 것을 모르고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사신이 [國都(국도)] 이르러 궁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자, 侯景(후경)이 노하여 사신을 잡아 가두었다. ()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양서> 동이열전 백제(쿠다라) 내용 중에


<-- 중국 남조 양나라 시대대 후경의 난(侯景--548) 이 일어났는데..

이 난을 본 백제(쿠다라) 의 사신들이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내용이 양서에 다 나옴

?? 통곡까지 하고 울었을까??

무슨 본국(고향)??

하여간 왜?? 통곡까지 하고 울었는지는 각자 생각해 보길


그리고 양나라에 기술자들을 파켠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 내용이 나옴

참고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축조 해준 기술자들이 바로 양나라 기술자들임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훈족(흉노족) 가야 부여 진국 삼한 금나라 청나라 그리고 아메노 히보코(이즈모) 포함)처럼 독특한 스키타이 흉노족들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관묘)도 아니고 그냥 중국식으로 짓고 중국풍(중국의 도교 사상)으로 장사 지내고 했음

참고로 저때 당시 무덤양식은 아주 아주 보수적이였기 때문에 거의?? 절대로 안 바뀜


Sunday, March 21, 2021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김씨 왕족들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2탄

역사스페셜 -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https://youtu.be/pddZiVtgIGA?list=PLB1E03DA95009F17C&t=376

KBS 역사스페셜신라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KBS 2009.7.18. 방송

https://youtu.be/Cp0K80v4XYg?t=2176

 

<-- 스키타이족들과 신라인들이 하나의 유전자 그룹으로 묶였음

신라만 괜히 골품 제도가 있었던게 아님

하여간 이것으로 끝난것이다 다름없음

 

결론 :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김씨 왕족들은 흉노족들이 100프로 맞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키타이족들

서양인들이였다


Saturday, March 20, 2021

중국 이민자 후손이자 과대포장되어진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었다 (feat. <조선왕조실록>)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1019_002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부절과 고서를 받다]

명나라 황제는 대감(大監) 황엄(黃儼)을 보내어, 정사(正使) 광록 소경(光祿少卿) 한확(韓確), 부사(副使)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부절(符節)과 고서(誥書)를 받들고 와서 왕명(王命)을 전달하게 되므로, 채붕(綵棚)을 매고 잡희(雜戲)를 베풀어 영접하였다.

임금은 편복을, 조신(朝臣)은 조복을 입고 모화루(慕華樓)에 나아갔다.

사신이 당도하자, 임금은 장전(帳殿)의 서쪽에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사신을 영접하여 장전 앞에 와서 말에서 내려 절(()를 받들고 장전에 들어가 용정(龍亭) 안에 고이 모시고 장전을 나오는데, 여러 관원이 앞을 인도하고, 사신은 절·고의 뒤를, 임금은 사신의 뒤를 따르고, 금고(金鼓의장(儀仗고악(鼓樂잡희(雜戲)는 다 평상의 의식과 같았다.

경복궁에 당도하자, 상왕은 궁문 밖에서 고명을 영접하고, 사신은 절·고를 받들고 근정전에 당도하니, 상왕은 전정(殿庭)에서 절·고에 먼저 절을 하고 악차로 들어갔다.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사신은 절()을 받들고 나가니, 임금과 상왕은 전정에 나가 공경히 전송하고, 여러 신하는 절을 인도하며 태평관(太平館)에 당도하여, 절을 북루(北樓) 위에 안치하였다.

상왕은 태평관에 와서 사신과 더불어 사례(私禮)를 행하고 수강궁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사례를 행하고 나와서 악차에 들러, 앉아서 여러 신하와 예를 행하였다.

예식이 끝나니, 한확(韓確)은 악차 앞에 와서 네 번 절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위로하고 안장 갖춘 말과 의복을 선사하였다.

임금이 사신과 더불어 행례할 적에, 한확은,

"감히 그럴 수 없다."

고 사양하는데, 임금이 강권하여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한확은 잔치에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한확은 본국 사람인데, 그 누이가 황제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까닭으로 황제는 영화를 보여 주기 위하여 북경으로 불러들여 고명을 주어 돌려보낸 것이었다.

- <세종실록 3, 세종 1 1 19일 갑자 2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


<--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선생들이 죽었다 깨나도 안 가르쳐 주고 교과서나 역사책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내용임

하여간 중국 이민자 후손인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였다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 - 4탄

한반도서 가장 큰 고대 무덤, 열자마자 덮은 까닭은… (2021-03-18)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87244.html

<-- 이 뉴스 내용을 한번 분석을 한번 해 보기로 하자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장고봉 고분 둘러싸고 고고학계 술렁

일본 고분 닮은 얼개·제사 흔적 논란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 다시 묻어

무덤 주인은 백제 통제 받은 왜인?

일 우익 임나일본부설 근거 삼을라 우려


<-- 중국사인 백제의 통제를 받았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는 그런 내용 안 나옴

중국사인 백제가 왜국의 통제를 받았지


<최근 발굴 조사된 전남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 내부 돌방(석실)의 모습. 

주검을 놓는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현문이 정면에 보이고 납작한 판석 여러 개를 놓은 바닥면과 깬돌을 정연하게 쌓은 돌방의 벽체가 보인다.

1990년대까지 두 차례 도굴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대 단일 무덤이 새해 벽두 마침내 열렸다.

고고학자들은 5~6세기 일본 고분과 판에 박은 듯한 무덤 얼개에 놀라워했고 곧장 흙에 덮여 다시 묻힌 것에 허탈해했다.

1월 국토 최남단 해남에서 들려온 무덤 발굴과 뒤이은 복토 소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고고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 언론에 왜?? 공개를 안 했을까나??

뭐를 숨기고 은폐를 할려고??


이 유적은 전남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이다.

6세기 전반 것으로 추정하는 이 무덤의 바깥 봉분과 돌방(석실) 내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2월까지 마한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1500여년 만에 드러났다.

놀랍게도 무덤 돌방은 일본 규슈섬의 바깥 해안과 아리아케 내해 일대에서 5~6세기 조성된 왜인 귀족 석실 무덤과 구조는 물론 무덤방 입구를 막기 전 지낸 제사 흔적까지 거의 같았다.


<-- 큐슈 지역의 왜인들 무덤과 같은데 무슨 마한?? 문화연구원??

전라도 왜국 문화연구원이라고 해야지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입구에서 본 내부 공간.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조성하고 위쪽 천장에 덮개돌(개석)을 놓는 전형적인 고대 일본 규슈지역의 석실 무덤 얼개를 띤다.

천장과 벽체에는 역시 일본 고대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을 한 흔적이 확인된다. >


<-- 당연함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헸으니까


조사단은 후면 봉토를 파고 무덤방과 통하는 널길(연도)로 들어가 안쪽을 살폈다.

조사 결과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만드는 고대 규슈의 석실분 특유의 얼개가 뚜렷했다.

천장과 벽체에도 일본 야요이시대 이래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 흔적이 남아 있었다.


<-- 무덤 양식이 완전히 일본 무덤 양식과 똑같다


출토품은 대부분 도굴됐으나, 무덤 주인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유물이 상당수 수습됐다.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뚜껑 달린 접시(개배) 10점이 대표적이다.

일부 개배 안에선 조기 등 생선뼈와 육류 등 제수 음식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덩어리도 검출됐다.

“일본 고분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가 주목된다”고 조근우 연구원장은 설명했다.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고 말했다.


<-- 먹는 음식들과 제례 유물들 즉 장례풍습도 일본과 똑같다


<돌문짝(문비석)이 엎어진 채 드러난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석실 입구의 사다리꼴 현문과 내부 모습.

내부 석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4m를 넘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2m에 달하는 큰 공간이다.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깬돌을 차곡차곡 올려 벽체를 쌓는 고대 서일본 규슈지역의 무덤 석실과 얼개가 똑같다. >


<-- 일본과 게속해서 똑같다고 하는 우리나라 고고학자들과 역사 학자들


<무덤 석실로 들어가는 연도(널길 통로)의 들머리 부분 발굴현장. 토압에 따른 붕괴 위험에 대비해 윗부분 덮개돌 아래 금속지지대를 받쳐놓았다. >


장고봉 고분은 봉분 길이 82m(도랑 포함), 높이 9m에 이른다.

황남대총 등 신라 경주의 대형 고분보다 큰 국내 최대급 무덤이다.

겉모습은 일본에서 고대 국가가 정립될 당시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 모양새다.

전방후원분은 봉분의 앞쪽은 네모진 방형,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특징을 따서 일본 학자들이 지은 명칭이다.

일본 무덤 형식인 전방후원분이 고대 해상로 길목인 전남북 해안 일대에 10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은 1980~1990년대 잇따라 확인됐다.


일본 우파 세력은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라고 주장했다.

한·일 학계에서 묻힌 이의 출신지가 한반도인지 왜인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고분군보다 큰 고분

그리고 일본 우파들이 주장을 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

그런데 중국 문헌들인 삼국지 후한서 양서등과 심지어 호태왕비만 봐도 전라왜구 임나가 존재했다는 것이 다 나오며 임나라른 지명이 다 나옴

그리고 삼국사기만봐도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가 왜국(큐슈왜구+전라왜구 임나) 이 무려 42번이나 싸운 기록들이 나옴


<공중에서 내려다 본 해남 장고봉 고분의 전경.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전방후원분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뒤쪽 원형 봉분에 역 ㄱ 자 모양의 갱을 파고 석실을 드러낸 발굴 공간이 보인다. >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의 겉모습.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근 봉분 모양인 고대 일본 특유의 무덤 전방후원분의 전형적인 모양새다. >


<-- 일본과 똑 같은 전방후원분의 형태임

이건 한민족 무덤이 절대로 아님


장고봉 고분도 논란 속에 풍상을 겪었다.

80년대 초 학계에 처음 보고됐을 당시엔 자연 지형인 언덕으로 간주했다.

80년대 중반 강인구 전 영남대 교수가 발굴 허가를 신청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불허로 외형 실측밖에 할 수 없었다.

1986년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보존 조처가 제대로 되지 않아 90년대 두 차례 도굴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이 2000년 도굴 갱을 확인하고 긴급 시굴조사로 내부를 일부 확인했지만, 공식 발굴은 20년 뒤인 지난해 가을에야 시작했다.


<-- 도굴 당하도록 방치를 했고 영남대 교수가 발굴을 허가해 달라고 신청을 했는데 다 묵살을 한 정부 관계자들 ㅋㅋㅋ

그리고 도굴이 자꾸 되니 20년이 지나 이제서야 시작을 했는데….


하지만 무덤 석실은 2월 말 다시 묻혔다.

연구원 쪽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처로, 5~9월 무덤 주구(도랑)의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발굴의 파장도 고려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조사 내용은 한반도 전방후원분 무덤 주인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지난 20여년간 백제 정부의 통제를 받는 왜인 관료·용병이란 설과 일본에 이주했다가 현지 무덤 문화의 영향을 받고 귀국한 마한인 또는 백제인이란 설 등 여러 추측이 나왔다.

장고봉 고분에서 규슈 고분과 판에 박은 얼개와 철갑옷 조각, 철촉 등 무기류가 묻힌 사실이 확인된 건 국내 학계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일본 우파 학자들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 발굴 조사한다더니 다시 묻어버림

그리고 저렇게 큰 고분군이 어떻해?? 중국사인 백제의 통제를 받을 수가 있음??

저런 큰 무덤들을 만들려면 아주 강력한 세력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지

그리고 마한?? 아님

왜인들이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조사한 장고봉 고분의 주요 출토품들. 원래 묻은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당했으나 이번에 뚜껑 달린 토기 접시(개배)와 아궁이틀 조각, 철제 갑옷과 철촉의 파편 등이 상당수 나와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조언을 새겨볼 만하다.

“장고봉 고분은 왜계 무덤 구조를 갖고 있지만, 묻힌 이를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됩니다.

외형, 구조, 유물 등을 당대 정세와 함께 살펴봐야 해요. 민족주의를 넘어 고대인의 관점까지 생각하며 열린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 권오영 교수는 이제 말을 하기 바람

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큐슈왜구+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는 것을 말이지

언제까지 숨기고 은폐를 할 것임??


일본왕은 중국인이다(feat.오태백과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문신 풍습)

[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