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0, 2021

신라 김씨 왕족들은 코미타투스였으며 서흉노 스키타이족들이였다

신라 천년왕국의 비밀, 8천km 황금의 초원길 (초원의제국 1부) [역사실험] KBS 2017.09.16 방송

https://youtu.be/rkrCu3hsa70

신라금관의 비밀코드, 전사戰士 코미타투스 (초원의제국 2부) [역사실험] KBS 2017.09.23 방송

https://youtu.be/uwbaKonFWjs

황금기사의 성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5-0527&program_id=PS-2016223187-01-000&broadcast_complete_yn=Y&local_station_code=00&section_code=05&section_sub_code=08

<-- 신라와 중앙 아시아의 기마민족들과 코미타투스는 모든 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똑같음

예가 마형대구, 호형대구, 삼엽문, 금 숭상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금 유물들, 각배(뿔잔), 곡옥, 동복, 순장문화, 편두풍습, 흰 옷을 즐겨 입기등

그리고 신라인의 유전자가 100프로 스키타이족들과 일치했음


전기차 특허 1위가 일본이 차지를 했음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국 전기차 경쟁력은… 특허 1위는 도요타, 현대·기아차는 5위 (2021.09.05)

https://www.chosun.com/economy/auto/2021/09/05/JCP7RRVY5JDSDD5QVJ4EVJBKTI/

이건 덤

美 전기차 특허 보유, 현대차 10위…1위는 도요타 (2021.09.02)

https://www.asiae.co.kr/article/2021090209034611752

日 전기차 기업, 기술에선 美보다 앞선다 (2021.09.05)

http://www.jeonp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477

판매량은 밀리는데…토요타, 전기차 관련 특허 1위 (2021-09-06)

http://autocast.co.kr/newsView/atc202109060007

테슬라 ‘삼중고’...전기차 특허 경쟁력서도 도요타에 밀려 (2021-09-02)

https://www.etoday.co.kr/news/view/2059133

<-- 우리나라도 더 분발들 하자

그리고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


Monday, August 16, 2021

중국사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고구려가 이긴 전쟁이 아니다 - 2탄 (feat. <삼국사기> 보장왕 편)

[중국 북조 선비족 고구려는 운이 좋았다 (feat. 수나라 양현감의 난과 고구려가 수나라에 항복을 청하다 (feat.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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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 613년 04월(음) )

여름 4월에 황제의 행차가 요하를 건너와서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 을 보내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 진군하여 신성(新城)에 이르자, 우리 병력 수만이 대항하여 싸웠다.

왕인공이 날쌘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였다.

아군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허락하였다.

비루(飛樓)·충자(橦)운제(雲梯)·지도(地道)로 네 방면에서 함께 진격하고 밤낮을 쉬지 않았다.

우리가 상황이 변하는 데 따라 막으니 20여 일에도 공략하지 못하고 아군과 적군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衝梯) 장대의 길이가 15장(丈)이었는데, 효과(驍果) 심광(沈光)이 그 끝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면서 아군과 싸워 짧은 병기로 맞붙어 십수 명을 죽였다.

아군이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떨어뜨리니 땅에 닿기 전에 마침 장대에 달린 줄이 있어 심광(沈光)이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 의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베 주머니 백여 만 개를 만들어 보내 흙을 가득 채워 그것을 쌓아올려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드는데, 넓이는 30보, 높이는 성과 같게 하여 전사들이 올라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또 팔륜루거(八輪樓車)를 만들어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보며 쏘게 하였다.

기일을 정해 장차 공격하려고 하므로, 성 안이 매우 위태롭고 긴박하였다.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글이 도착했다.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고, 또 고관의 자제들이 모두 양현감의 처소에 있음을 듣고 더욱 걱정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평소에 양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불안하여 도망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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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 613년 04월(음) ) 

황제가 밤에 비밀리에 여러 장수를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기계•공격도구들이 산처럼 쌓였고, 군영의 보루와 장막은 평온하게 움직이지 않았으나, 무리의 마음은 두렵고 염려가 되어 다시 부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아군은 즉시 이를 알아차렸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단지 성안에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다음날 오시(午時)가 되어서야 바야흐로 점차 밖으로 나갔으나, 수(隋)의 군대가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경과해서야 비로소 수천 병력을 내어 쫓았으나, 수의 군대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늘 8,90리의 거리를 유지하였다. 

요수(遼水)에 도달할 즈음에 황제의 진영이 다 건넌 것을 알고는 그제야 감히 후군에 가까이 갔다. 

이때 후군도 수만 명이었는데 아군이 따라가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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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제가 또 고구려 정벌을 명하다 ( 614년 02월(음) ) 

25년(614) 봄 2월에 황제가 전체 신료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할 일을 의논하게 하였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록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병사들을 다시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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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을 청하다 ( 614년 07월(음) ) 

가을 7월에 황제의 수레가 회원진(懷遠鎭)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천하가 이미 소란스러워 징발된 병사들이 정한 날짜를 어기고 도착하지 않은 자가 많았고, 우리 나라 또한 어렵고 궁핍하여 있었다. 

내호아(來護兒)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 병력이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가 이를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그에 따라 곡사정을 돌려보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사지절(使持節)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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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 614년 08월(음) ) 

8월에 황제가 회원진에서 군대를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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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다시 침략해오지 못하다 ( 614년 10월(음) ) 

겨울 10월에 황제가 서경(西京)에 돌아와서 우리 사신과 곡사정을 대묘(大廟)에 알리고, 곧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장수들에게 명하여 장비를 엄하게 하고 다시 후에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으나 마침내 실현하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영양왕 조


참고로 수나라 양제는 폭군이였음

그래서 양제가 집권하는 동안 민란이 무려 120여건이나 일어났음.


중국사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고구려가 이긴 전쟁이 아니다 - 1탄 (feat.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때 중국사인 고구려는 운이 좋았다 (feat. 수나라 양현감의 난 그리고 고구려가 수나라에 항복을 청하고 속죄를 하다(feat.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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煬帝(양제)가 帝位(제위)를 이어 받으매 天下(천하)가 전성하여, 高昌[國]王(고창국왕)과 突厥(돌궐)의 啓人可汗(계인가한)이 친히 대궐에 나아와 朝貢(조공)을 바쳤다. 

이때 元(원 - 고구려 영양왕)에게 入朝(입조)케 하니, 元(원 - 영양왕)이 두려워하여 자못 藩臣(번신)의 예절을 소홀히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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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대업)] 9년(A.D.613; 高句麗 嬰陽王(고구려 영양왕) 24) 에 [煬]帝(양제)가 다시 親征(친정)하였다. 

이때는 諸軍(제국)에게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勑旨(칙지)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城(성)을 공격하니,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이 무렵 楊玄感(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反書(반서)가 도착되자, [煬]帝(양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로 六軍(6군)을 이끌고 돌아 왔다. 

[이때] 兵部侍郞 斛斯政(병부시랑 곡사정)이 高[句]麗(고구려)로 망명하여 들어가니, 高[句]麗(고구려)가 정보를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추격을 가하여 후속의 부대는 대부분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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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業(대업)]10년(A.D.614; 高句麗 嬰陽王(고구려 영양왕) 25) 에 또 다시 天下(천하)의 군사를 징벌하였으나, 때마침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인민이 流亡(유망)하고, 곳곳마다 교통이 두절되어 군사가 대개 期限(기한)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 

遼水(요수)에 이르자, 高[句]麗(고구려)도 피폐되어졌기 때문에 使臣(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는 동시에 斛斯政(곡사정)을 압송하여 속죄하였다. 

[煬]帝(양제)는 이를 허락하고 懷遠鎭(회원진)에 주둔하면서 降款(항관 – 항복하여 성심을 다함)을 접수하였다. 

아울러 포로와 노획한 軍器(군기)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煬帝(양제)는] 京師(경사)에 이르러 高[句]麗(고구려)의 使者(사자)로 하여금 친히 太廟(태묘)에 告(고)하도록 한 뒤 억류시켰다. 

이어서 元(원 – 영양왕)을 불러 들여 入朝(입조)토록 하였으나, 元(원)이 끝내 오지 않았다. 

[煬]帝(양제)는 諸軍(제군)을 엄중히 정비하여 다시 토벌할 것을 꾀하였으나, 마침 天下(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걸국 시행하지 못하였다. 

- <수서> 동이열전 중국 북조 선비족 고구려


참고로 수나라 양제는 폭군이였음

그래서 양제가 집권하는 동안 민란이 무려 120여건이나 일어났음.


Tuesday, August 10, 2021

전라왜구 임나에 대한 우리나라 뉴스들의 거짓말 즉 역사 왜곡을 한번 보기로 하자

[단독]30년 만에 임나일본부 망령서 벗어난 신덕 고분 (2021-08-10)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10810/108471668/1

“함평 신덕 1호분 왜인 아닌 지역수장 무덤 가능성 높아”

30년 미공개 발굴조사 결과 이달 말 발표

임나일본부설에 이용될 우려로 인해 30년간 공개되지 않은 삼국시대 ‘신덕 1호분’ 발굴조사 결과가 이달 말 발표된다.

동아일보가 미리 입수한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고분 출토 유물에서는 백제와 왜(倭)의 문화가 혼재된 양상이 확인됐다.

조사 결과를 분석한 한일 고고학자들은 20,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의 주인이 지역 수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한반도에 진출한 왜인이 묻혔을 것으로 보는 임나일본부설의 시각과 배치되는 것이다.


함평 신덕고분 발굴 30년만에 보고서…"주인은 여전히 미궁" (2021.08.10 11)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21/08/773520/

국립광주박물관 발간…1호분에 왜·백제·토착 세력 영향 혼재

한때 `임나일본부설` 근거 우려도…"학계 논의 활발해지길"

(중략)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보고서에서 신덕 1호분에 대해 "무덤 형태와 매장시설로 보면 왜 규슈 세력과 관계가 깊은 상황에서 축조됐지만,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에서는 백제 영향도 확인된다"면서 무덤 주변 도랑 형태, 돌 뚜껑을 덮은 무덤길의 항아리 등을 근거로 현지 토착 세력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 1호분에서 나온 마구 세트, 구슬과 시신 안치 방식은 백제계 속성이지만, 관과 삼각형 철모는 왜와 백제 요소가 섞여 있다고 설명했다.

또 신덕 1호분에서 발견된 구슬이 피장자 위계가 상당히 높았음을 알려주는 유물로 백제를 통해 입수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목관 재질은 무령왕릉과 같은 일본 특산 나무인 금송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현재 호남 지역 전방후원분은 12곳에 14기가 산재한다고 알려졌으며, 축조 시기는 모두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으로 짐작된다.

(후략)

<-- 우리나라 학자들의 거짓말이 하늘을 찌른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도 전라왜구 임나의 실체가 다 나오며 중국사인 고구려 호태왕이비에도 전라도 왜국 즉 전라왜구 임나가 다 나온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수두룩하게 발견이 되어지고 있는 일본식 무덤들이 고구려 신라의 무덤들과 맘먹거나 크며 백제의 무덤들은 고구려 신라 전라왜구 임나의 무덤들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다

이런데 이게 용병? 의 무덤들과 왜국의 신하 나라이자 중국사인 백제에 파견된 사람의 무덤들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이 무덤들이 백제의 무덤들보다 훨씬 클까?

하여간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Thursday, July 15, 2021

신라 김씨 왕족이 흉노족인 동시에 서흉노족인 스키타이족 서양인이였다는 고고학적인 무덤의 고인골이 또 발견이 됨

삼국시대 180cm 키다리가… 최장신 유골, 경주서 발굴 (2021.07.15)

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1/07/15/UMJC34LFRRCGFCWXKWJI5LIM6M/

삼국시대 최장신 180cm 인골 발견… 머리 모양이? (2021-07-15)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10715/107967444/1

9척 석탈해급 키···경주 무덤속 180cm 신라남성 누구였을까 (2021.07.15)

https://news.joins.com/article/24106314

<--오직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와 삼한에서만 나오는 편두 풍습

이 편두 풍습은 삼한 특히 변진서도 하는 풍습이다라고 중국 문헌들에 나옴

이 편두 풍습은 전형적인 중앙 아시아의 넓은 초원에 살던 흉노족들의 풍습임

참고로 신라 김씨 왕족들의 시조인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

특히 투후 김일제의 키가 무려 190이였음


Tuesday, July 6, 2021

관산성 전투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feat. <삼국사기> 와 <일본서기>)

관산성에서 백제를 물리치다 ( 554년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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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해석:

관산성에서 백제를 물리치다 ( 554년 (음) )

〔15년(554년)〕 백제왕 명농(明穠)이 가야?[加良]와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飡)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혹은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 이 주병(州兵) 을 이끌고 나아가 서로 맞붙어 싸웠는데, 비장(裨將) 인 삼년산군(三年山郡) 의 고간(高干) 도도(都刀) 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대들이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4명과 사졸(士卒) 29,600명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삼국사기> 진흥매금대왕 조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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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武力爲新州道行軍揔管, 甞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해석 :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할아버지 [김]무력(武力) 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이 되어 일찍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백제 왕과 그 장수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斬首)하였다.

- <삼국사기> 김유신 태대각간 열전 상


성왕이 죽다 ( 554년 07월(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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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歩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謚曰聖.

해석 :

성왕이 죽다 ( 554년 07월(음) )

32년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성왕 조


百濟(백제) 聖明王(성명왕)의 戰死(전사) ( 554년 12월(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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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

百濟(백제) 聖明王(성명왕)의 戰死(전사) ( 554년 12월(음) ) 

겨울 12월 百濟(벡제)가 下部(하부)의 杆率汶斯干奴(간솔문사간기)를 보내 표를 올려 “百濟王 臣 明(백제왕 신 명)과 安羅(안라)에 있는 倭臣(왜신)들, 任那(임나) 여러 나라의 旱岐(한기)들은 아룁니다. 

斯羅(사라-신라)가 無道(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박-고구려)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미어거-みやけ(미야게) : 官家(관가))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有至臣(유지신)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斯羅(사라-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有至臣(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斯羅(사라-신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東方(동방)의 領(령)인 物部莫奇武連(물부막기무련)을 보내 자기 方(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函山城(함산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有至臣(유지신)이 데리고 온 백성 竹斯物部莫奇委沙奇(죽사물부막기위사기)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威靈(위령-명령)의 도움을 받아 이 달 9일 酉時(서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新羅(사라-신라)뿐이라면 有至臣(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狛(박-고구려)이 斯羅(사라-신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竹斯島(죽사도)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毾㲪(탑등) 1領(령), 도끼 300口(구), 사로잡은 城(성)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餘昌(여창-후에 위덕왕) 新羅(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耆老(기로-60이 넘은 노인)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餘昌(여창-후에 위덕왕)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大國(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新羅國(신라국)에 들어가 久陀牟羅(구타모라)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明王(명왕)은 餘昌(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新羅(신라)는 明王(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新羅(신라)에서 佐知村(좌지촌)의 飼馬奴 苦都(사마노 고도)에게 “苦都(고도)는 천한 奴(노)이고 明王(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고도)가 明王(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명왕)이 “왕의 머리를 奴(노)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노)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明王(명왕)이 胡床(호상)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知(곡지-고도)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明王(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苦都(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는 “新羅(신라)가 明王(명왕)의 頭骨(두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신라왕)이 明王(명왕)의 뼈를 北廳(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도당)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餘昌(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筑紫國造(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안교)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여창)이 國造(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안교군)”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新羅(신라) 장수들이 百濟(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日本 天皇(일본 천황)이 任那(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百濟官家(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긴메이 천황 15년)


임진왜란은 조명 연합군이 일본한테 이긴 전쟁이 아니다 ( feat. <명사> 조선열전의 노량해전 내용)

먼저 임진왜란(분로쿠노에키) 정유재란(게이초노에키) 은 조명 연합군이 이긴 전투가 아니다

[<명사> 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feat. <명사> 조선열전의 노량해전에 대한 내용에는 명나라 군대가 다 했다고 나오며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아에 나오지를 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지 안았다면 중국과 조선이 일본에 이길 가망이 없다라고 나온다)]


[萬曆 二十六年(1598)]十一月, 淸正發舟先走, 麻貴遂入島山·酉浦, 劉綎攻奪曳橋. 石曼子引舟師救行長, 陳璘邀擊敗之. 諸倭揚帆盡歸.

自倭亂朝鮮七載, 喪師數十萬, 糜餉數百萬, 中朝與屬國迄無勝算, 至關死而禍始息.

<十一月,清正發舟先走,麻貴遂入島山、酉浦,劉綎攻奪曳橋。石曼子引舟師救行長,陳璘邀擊敗之。諸倭揚帆盡歸。
 
自倭亂朝鮮七載,喪師數十萬,糜餉數百萬,中朝與屬國迄無勝算,至關白死而禍始息。>

- <明史> 朝鮮列傳

해석:

[萬曆(만력(] 26년(A.D.1598; 朝鮮 宣祖(조선 선조) 31) 11월에 [加藤]淸正(가등청정 – 가토 기요마사) 이 배를 내어 먼저 달아났다.

麻貴(마귀)는 드디어 島山·酉浦(도산, 유포)에 들어갔고, 劉綎(유정) 은 曳橋(애교) 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石曼子(석만자 – 시마즈 요시히로) 가 배를 이끌고 [小西]行長(소서행장 – 고니시 유키나가) 을 구원하려 하자, 陳璘(진린) 이 이를 맞이하여 쳐부수어 패배시켰다.

여러 곳의 倭軍(왜군) 이 돛을 달고 모두 돌아갔다.

倭(왜)가 朝鮮(조선)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는데도 中國(중국) 과 朝鮮(조선) 이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는데, 關白(관백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 죽고서야 禍亂(화란) 이 비로소 종식되었다.

- <명사> 조선열전

그렇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지 안았다면 거지 노예국가 500년 중국의 개였던 이씨 조선은 끝장이 났고 중국 명나라도 불안한 상황이였다

그리고 명나라 군대가 다 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도망자 이순신은 이름조차 안나온다

<-- 이런 도망자 이순신이 그 당시 일본과 명나라에서 유명했다고?

그리고 중국 명나라 왕이 도망자 이순신한테 팔사품을 하사해 줬다고 거짓말을 한 우리나라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입만 열면 선동질임

일본과 동족인 전라왜구 임나 지역의 시험지 문제 (feat. 윤석열 X 파일? 이준석 병역 비리?)

‘윤석열 X파일시험문제 논란 군산 A·교사···전북교육청감사방침” (2021.07.06)

https://news.joins.com/article/24099427

전북도교육청은윤석열 전 검찰총장 및 가족과 관련한 X파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병역 논란을 시험문제 예시로 내 물의를 빚은 전북 군산시 A고교와 교사에 대해 감사를 벌일 예정이다.


‘윤석열 X파일’ ‘이준석 병역 비리’… 시험 문제로 낸 高校 (2021.07.05)

학생·학부모정치 편향비판해당 학교, 재시험 치르기로

https://www.chosun.com/politics/assembly/2021/07/05/NT72EV45H5CQPKANM6IZOKTALA/

최근 교육 현장에서 편향된 역사 인식이나 정치적 주제를 다룬 시험 문제와 강연 등이 잇따르면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전북의 한 고등학교 시험에서윤석열 X파일이준석 병역 비리를 예시로 든 서술형 문제가 출제되는가 하면,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김원웅 광복회장의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 발언이 담긴 영상이 문제가 됐다.


전북교육청, 기말시험에윤석열 X파일물은 군산 고교 감사 방침 (:2021-07-06)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02406.html

2학년 문제된 두 문항 6일 재시험 치러

(중략)

이 고등학교는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2일까지 1학기 기말고사를 치렀다.

기간제 교사는 2학년생활과 윤리시험 문제에서 정약용의 <목민심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근거해 공직자에게 필요한 덕목을 서술하도록 하면서최근 정치권의 윤석열 X파일의 장모와 처’, ‘이준석 병역 비리 등의 쟁점을 염두에 두며라는 단서를 달았다.

논란이 일자 학교 쪽은 재시험을 결정했다.

2학년 학생 68명은 이날 오후 다시 시험을 쳤다.

<-- 일본과 동족인 전라왜구 임나가 한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들어내는 뉴스임 ㅋㅋㅋ

Sunday, June 27, 2021

일본에는 예전부터 한국 원정녀들이 아주 많았고 지금도 많다

현대판 자진 위안부? 창녀?

20대 한국 여성 일본 불법 입국 후 수년간 접대부로 일하다 적발 (2021.06.27)

https://www.segye.com/newsView/20210627506463


不正入で韓人の女逮捕 うそ証明書で...は「ホステス」(2021.06.24) - 부정입국한 한국인 여자 구속, 거짓 증명서로... 사실은 [호스테스]

<-- 이 뉴스 유튜브에서 지워짐 ㅋㅋㅋ

그러나 이것이 있음

https://bakusai.com/thr_show/acode=3/ctgid=137/bid=1098/tid=9609883/

https://ameblo.jp/bangkokoyaji/entry-12683631642.html


20代韓人女性、日本に不法入後「ホステス」としてき逮捕...ネットユら「の恥さらし」=韓 (2021.06.28) - 20대 여성, 일본 불법입국 후 '호스티스'로 일하다 체포...한국 네티즌 '나라 망신' = 한국


<-- 이런 뉴스는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임

아주 오래 전부터 일본에 불법으로 입국해서 몸 파는 한국 여자들이 바글바글함

우리나라 언론들에서 쉬쉬해서 그렇지

하여간 이래놓고 위안부 위안부 하니 일본에서 씨알이 안 먹히는 것임

일본 말고도 다른 나라들에서도 많음

그런데 여성부는 뭐햐는지?


Saturday, May 1, 2021

삼한 즉 한민족의 모태 나라는 "진국' 이라는 나라지 중국사인 (고) 조선이 아니다 (feat. <후한서> 동이열전 한민족 내용)

[삼한의 모태 나라는 진국(辰國)이다 (feat. 중국 문헌인 <후한서> 동이열전 한민족 내용)]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jo&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o_003r_0010_0070_0020&position=-1

○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해석 :

馬韓(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낙랑), 남쪽은 倭()와 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에맥)과 接()하여 있다.

弁辰(변진)은 辰韓(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 伯濟(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萬餘戶(만여호), 작은 나라는 數千家(수천가)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진국)이다.

마한이 [韓族(한족)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진왕)으로 삼아 目支國(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삼한)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 [三韓(삼한)] 諸國王(제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 <후한서> 동이열전 한민족 내용 중에


<-- 중국사인 () 조선이라는 말은 아에 나오지를 안는다

참고로 이 조선이라는 멍칭이 처음 갑자기 등장한 시기가 바로 허울뿐이였던 고려시대때 일임

허울뿐이였던 고려가 몽골의 약 90년간 속국?? 식민지가 막 시작이 될때 일임


일제 시대 동안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려는 수가 무려 약 80만명(1938년~1943년) 이었다 (feat. 조선적 일본군인 - <위키백과> 출저)

[일제 시대때 일본군에 자원 입대할려는 조선인들이 무려 약 80만명 정도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A0%81_%EC%9D%BC%EB%B3%B8%EA%B5%B0%EC%9D%B8#%EA%B0%9C%EC%9A%94

개요

(중략)

일본 통치 하에서 군무원으로 들어가 전몰자가 된 한반도 출신자 가운데 조선인, 일본군을 포함 약 2 1000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A0%81_%EC%9D%BC%EB%B3%B8%EA%B5%B0%EC%9D%B8#%EB%AA%A8%EC%A7%91

조선적 일본군인

연도     지원자       입소자        선발율    지원배수

1938 2946         406          16.2%      7.3

1939 12,348      613            4.9%    20.2

1940 84,443     3,060          3.6%    27.6

1941 144,743   3,208         2.2%     45.1

1942 254,273   4,077         1.6%     62.4

1943 303,394   6,000         1.9%     50.6


<한국 현대 정부에서 친일 청산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제국 시절 일본제국군 조선인 특별 지원병제에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무려 80 2천명이나 지원했기 때문이다 팩트>

일본을 도운 부역국인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음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도 우리나라는 참석을 못 했음


명량해전은 정말로?? 이긴 전투일까?? (feat. 일본측이 분석한 동영상)

[일본측의 명량해전 분석]

鳴梁海【朝鮮出兵】 日本水軍 vs 朝鮮水軍。<字幕付き>

https://youtu.be/Pqki39d9fsk

<-- 일본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있음

일본측 기록들에는 작은 세키부네(30~40명 정도가 탈수 있는 함선) 수십척이 한국판 카미카제인 울돌목을 돌진해서 일본군들이 수십 명 즉 경미(본 학자들이 일본측 사료 근거를 바탕으로 새롭게 밝혀내고 있음그러나 일본측 죽은 수는 불명임)하게 죽었다라고 하고 이순신은 수십척을 당파하고 바로 튄 후 나머지 세키부네들이 조선 수군을 무려 170키로나 추적을 하고 일본군들의 다른 대규모 큰 배들은 서해안으로 계속해서 돌진을 해 서해안에 입성을 해 서해안과 전라도 전 지역을 초토화 시켰다고 함

참고로 이순신 지가 쓴 난중일기에도 계속해서 도망을 쳤다라고 나옴

그리고 일본이 계속해서 보급을 하고 해상권을 장악을 했다라고 함

그래서 일본의 서해안과 전라도 전역의 초토화라는 목표 달성을 성공했다라고 함

위에 말했듯이 이순신의 판옥선과 다른 판옥선들은 일본의 추적으로 인해 무려 170키로나 도망을 쳤다라고 함

그리고 조선측 일본측 기록들을 바탕으로 명량해전때 12~13척 퐌옥선 말고 위장선, 초탐선의 배들이 32~100척 이나 있었다고 함

즉 긁어 모을 배들은 다 긁어 모은 셈임

참고로 유럽은 역사를 공동 집필을 하고 있음

예가 100년 전쟁도 영국과 프랑스는 공동 집필을 함

자 그래서 임진왜란(분로쿠노에키) 정유재란(게이초노에키) 도 한중일 공동 집필을 해야 하는 것임


Monday, April 19, 2021

임진왜란(분로쿠노에키) 때 전라도(전라왜구) 도의 순왜에 대해서 살짝 한번 알아보자 (feat. <조선왕조실록>)

[전라도(전라왜구 임나)의 순왜(임진왜란때 일본에 달라붙은 전라도놈들) ]


<선조실록 94, 선조 30 11 12일 기해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11012_004


*전라 우수사가 왜군 앞잡이인 향리 사노 등의 실상과 그 처단법을 아뢰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기를,

"해남(海南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무안(務安)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적에게 붙어 사족(士族)의 피난처를 일일이 가르쳐 주어, 거의 다 살육되었습니다.

해남(海南)의 노직 향리(老職鄕吏) 송원봉(宋元鳳)과 가속 서리(假屬書吏) 김신웅(金信雄) 등은 혹은 좌수(座首)라느니 혹은 별감(別監)이라느니 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살육하였으며, 육방(六房)을 차정(差定)하는 데 있어서도 사노(寺奴) 심운기(沈雲起)는 이방(吏房), 향리 송사황(宋士黃)은 호방(戶房), 사노 서명학(徐命鶴)은 예방(禮房), 사노 박인기(朴麟奇)는 병방(兵房), 향리 차덕남(車德男)은 형방(刑房), 사노 박희원(朴希元)은 창색(倉色), 사노 다물사리(多勿沙里줏돌이(注叱石乙伊) 등은 도장(都將), 사노 윤해(尹海)는 각처의 정탐, 사노(私奴) 언경(彦京)은 응자 착납(應子捉納)으로 각각 차정하여, 왜노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모든 성의와 힘을 다하여 왜노에게 아양을 떨었으며, 또 왜진(倭陣)이 철수하여 돌아갈 적에 뒤떨어진 적에게 머물기를 정하여 세 곳에 주둔시켜 놓고서, 그를 빙자하여 온갖 흉악한 짓을 다 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장수를 차정하여 적을 섬멸할 적에 송원봉과 사노(寺奴) 인세·윤해와 사노(私奴) 언경은 잡아다가 이유없이 지만(遲晩 - 자백)을 받아 부대시참(不待時斬)으로 행형(行刑)하여 효시해 연해의 백성들에게 국법이 있음을 알도록 하고, 그 나머지의 미처 사로잡지 못한 사람은 지금 뒤쫓아 잡는 중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선조실록 94, 선조 30 11 12일 기해 4번째기사]


<-- 전라왜구 임나 사람들이 전부 일본에 붙어, 선비나 양반이 숨어있는 곳을 일일이 가르쳐 주어 다 죽임

임진왜란(분로쿠노에키) 때 전라도(전라왜구) 사람들은 오히려 같은 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죽임

전라도(전라왜구) 사람들은 일본놈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모든 성의와 힘을 다해 일본놈들에게 아양을 떨었으며, 온갖 흉악한 짓을 다함


결론 : 역사는 절대로 거짓말을 안한다


Friday, April 2, 2021

전 세계 로봇 강국 나라들을 한번 알아보자 (feat. 대한민국의 로봇 기술은 아직 유치원생 수준)

세계 산업용 로봇 제조기업 Top10 (2015.11.08)

http://www.irobot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74

일본 6개사로 산업용 로봇 강자 확인, 최고기업은 ABB 차지

<-- 일본은 로봇 기술 회사들이 무려 6개사

그리고 이탈리아 독일 각각 1개사씩 있고 스위스가 2개사인데 스위스가 1위 먹음

 

산업용 로봇 사용률 1위인 한국, 로봇 만드는 기술은 '걸음마' (2019.03.04)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4/2019030400156.html

[질주하는 세계 - 기업] 초라한 한국의 로봇 산업

제조업 강국이라는 한국, 알고보니 일본산 로봇에 의존

삼성, 갤럭시 제작 위해 1억원짜리 화낙 제품 2만대 주문

<-- 일본이 전 세계 산업용 로봇 시장을 거의 잡아먹고 있는 상태임

 

로봇 활용도 1위 한국, 글로벌급 로봇기업은 ‘0’ (2019.04.10)

https://news.joins.com/article/23436440

‘생산 1위 일본, 소비 1위 중국, 활용도 1위 한국.’

동북아 로봇 삼국지 뒤처진 한국

일본, 도쿄 올림픽 지렛대 삼아

서비스용 로봇 선두 굳히기 전략

중국, 어린 로봇 인재 양성 집중

한국은 인력 부족 기술개발 더뎌

<-- 한중일중에 로봇 산업 육성이 가장 뒤떨어진 대한민국


결론 : 김치국부터 마시지 말고 더욱 더 기술에 매진해야 하며 반일감정을 외치며 감성적으로 입으로만 일본한테 뭐라 할게 아니라 일본의 좋은 기술들을 먼저 배우고 나서 어느 정도 일본의 기술 수준에 근접하거든 그때 정식으로 일본한테 뭐라고 하는게 더 효과적이다

윤치호 왈 : 조선인은 10프로의 이성과 90프로의 감성으로 살아간다


Sunday, March 28, 2021

백제는 중국사다 (feat. 중국 양나라의 "후경의 난" 때 통곡을 한 백제 사신들과 양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요청한 백제 - <양서>)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일어난 후경의 난(侯景--548)

이 후경의 난을 본 백제(쿠다라) 사신들이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내용이 <양서> 에 나오는 내용과 양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요청을 한 백제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이 내용을 한번 보기로 하자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jo&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o_008r_0010_0030_0050&position=-1

中大通六年(534)•大同七年(541), 累遣使獻方物; 幷請涅盤等經義毛詩博士, 幷工匠畫師等, 敕並給之. 太淸三年, 不知京師寇賊, 猶遣使貢獻; 旣至, 見城闕荒毁, 並號慟涕泣. 侯景怒, 囚執之, 及景平, 方得還國.

- <梁書東夷列傳 百濟 中大通 6


해석 :

[中大通(중대통) 6(534)과 大同(대동) 7(541) 에 거푸(자주 혹은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涅盤經(열반경) 등에 대한 義疏(의소책의 뜻을 풀이함 혹은 문자의 뜻을 해명함)와 毛詩博士(모시박사) 및 工匠畫師(공장화사) 등을 구하므로모두 공급하여 주도록 詔敕(조칙) 하였다.” (혹은 모두 공급하여 주었다.)

太淸(태청) 3(549)에 京師(경사 - 양나라 수도)가 적에게 침범당한 것을 모르고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사신이 [國都(국도)] 이르러 궁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자, 侯景(후경)이 노하여 사신을 잡아 가두었다. ()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양서> 동이열전 백제(쿠다라) 내용 중에


<-- 중국 남조 양나라 시대대 후경의 난(侯景--548) 이 일어났는데..

이 난을 본 백제(쿠다라) 의 사신들이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내용이 양서에 다 나옴

?? 통곡까지 하고 울었을까??

무슨 본국(고향)??

하여간 왜?? 통곡까지 하고 울었는지는 각자 생각해 보길


그리고 양나라에 기술자들을 파켠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 내용이 나옴

참고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축조 해준 기술자들이 바로 양나라 기술자들임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훈족(흉노족) 가야 부여 진국 삼한 금나라 청나라 그리고 아메노 히보코(이즈모) 포함)처럼 독특한 스키타이 흉노족들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관묘)도 아니고 그냥 중국식으로 짓고 중국풍(중국의 도교 사상)으로 장사 지내고 했음

참고로 저때 당시 무덤양식은 아주 아주 보수적이였기 때문에 거의?? 절대로 안 바뀜


Sunday, March 21, 2021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김씨 왕족들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2탄

역사스페셜 -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https://youtu.be/pddZiVtgIGA?list=PLB1E03DA95009F17C&t=376

KBS 역사스페셜신라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KBS 2009.7.18. 방송

https://youtu.be/Cp0K80v4XYg?t=2176

 

<-- 스키타이족들과 신라인들이 하나의 유전자 그룹으로 묶였음

신라만 괜히 골품 제도가 있었던게 아님

하여간 이것으로 끝난것이다 다름없음

 

결론 :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김씨 왕족들은 흉노족들이 100프로 맞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키타이족들

서양인들이였다


Saturday, March 20, 2021

중국 이민자 후손이자 과대포장되어진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었다 (feat. <조선왕조실록>)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1019_002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부절과 고서를 받다]

명나라 황제는 대감(大監) 황엄(黃儼)을 보내어, 정사(正使) 광록 소경(光祿少卿) 한확(韓確), 부사(副使)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부절(符節)과 고서(誥書)를 받들고 와서 왕명(王命)을 전달하게 되므로, 채붕(綵棚)을 매고 잡희(雜戲)를 베풀어 영접하였다.

임금은 편복을, 조신(朝臣)은 조복을 입고 모화루(慕華樓)에 나아갔다.

사신이 당도하자, 임금은 장전(帳殿)의 서쪽에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사신을 영접하여 장전 앞에 와서 말에서 내려 절(()를 받들고 장전에 들어가 용정(龍亭) 안에 고이 모시고 장전을 나오는데, 여러 관원이 앞을 인도하고, 사신은 절·고의 뒤를, 임금은 사신의 뒤를 따르고, 금고(金鼓의장(儀仗고악(鼓樂잡희(雜戲)는 다 평상의 의식과 같았다.

경복궁에 당도하자, 상왕은 궁문 밖에서 고명을 영접하고, 사신은 절·고를 받들고 근정전에 당도하니, 상왕은 전정(殿庭)에서 절·고에 먼저 절을 하고 악차로 들어갔다.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사신은 절()을 받들고 나가니, 임금과 상왕은 전정에 나가 공경히 전송하고, 여러 신하는 절을 인도하며 태평관(太平館)에 당도하여, 절을 북루(北樓) 위에 안치하였다.

상왕은 태평관에 와서 사신과 더불어 사례(私禮)를 행하고 수강궁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사례를 행하고 나와서 악차에 들러, 앉아서 여러 신하와 예를 행하였다.

예식이 끝나니, 한확(韓確)은 악차 앞에 와서 네 번 절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위로하고 안장 갖춘 말과 의복을 선사하였다.

임금이 사신과 더불어 행례할 적에, 한확은,

"감히 그럴 수 없다."

고 사양하는데, 임금이 강권하여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한확은 잔치에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한확은 본국 사람인데, 그 누이가 황제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까닭으로 황제는 영화를 보여 주기 위하여 북경으로 불러들여 고명을 주어 돌려보낸 것이었다.

- <세종실록 3, 세종 1 1 19일 갑자 2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


<--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선생들이 죽었다 깨나도 안 가르쳐 주고 교과서나 역사책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내용임

하여간 중국 이민자 후손인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였다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 - 4탄

한반도서 가장 큰 고대 무덤, 열자마자 덮은 까닭은… (2021-03-18)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87244.html

<-- 이 뉴스 내용을 한번 분석을 한번 해 보기로 하자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장고봉 고분 둘러싸고 고고학계 술렁

일본 고분 닮은 얼개·제사 흔적 논란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 다시 묻어

무덤 주인은 백제 통제 받은 왜인?

일 우익 임나일본부설 근거 삼을라 우려


<-- 중국사인 백제의 통제를 받았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는 그런 내용 안 나옴

중국사인 백제가 왜국의 통제를 받았지


<최근 발굴 조사된 전남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 내부 돌방(석실)의 모습. 

주검을 놓는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현문이 정면에 보이고 납작한 판석 여러 개를 놓은 바닥면과 깬돌을 정연하게 쌓은 돌방의 벽체가 보인다.

1990년대까지 두 차례 도굴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대 단일 무덤이 새해 벽두 마침내 열렸다.

고고학자들은 5~6세기 일본 고분과 판에 박은 듯한 무덤 얼개에 놀라워했고 곧장 흙에 덮여 다시 묻힌 것에 허탈해했다.

1월 국토 최남단 해남에서 들려온 무덤 발굴과 뒤이은 복토 소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고고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 언론에 왜?? 공개를 안 했을까나??

뭐를 숨기고 은폐를 할려고??


이 유적은 전남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이다.

6세기 전반 것으로 추정하는 이 무덤의 바깥 봉분과 돌방(석실) 내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2월까지 마한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1500여년 만에 드러났다.

놀랍게도 무덤 돌방은 일본 규슈섬의 바깥 해안과 아리아케 내해 일대에서 5~6세기 조성된 왜인 귀족 석실 무덤과 구조는 물론 무덤방 입구를 막기 전 지낸 제사 흔적까지 거의 같았다.


<-- 큐슈 지역의 왜인들 무덤과 같은데 무슨 마한?? 문화연구원??

전라도 왜국 문화연구원이라고 해야지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입구에서 본 내부 공간.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조성하고 위쪽 천장에 덮개돌(개석)을 놓는 전형적인 고대 일본 규슈지역의 석실 무덤 얼개를 띤다.

천장과 벽체에는 역시 일본 고대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을 한 흔적이 확인된다. >


<-- 당연함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헸으니까


조사단은 후면 봉토를 파고 무덤방과 통하는 널길(연도)로 들어가 안쪽을 살폈다.

조사 결과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만드는 고대 규슈의 석실분 특유의 얼개가 뚜렷했다.

천장과 벽체에도 일본 야요이시대 이래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 흔적이 남아 있었다.


<-- 무덤 양식이 완전히 일본 무덤 양식과 똑같다


출토품은 대부분 도굴됐으나, 무덤 주인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유물이 상당수 수습됐다.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뚜껑 달린 접시(개배) 10점이 대표적이다.

일부 개배 안에선 조기 등 생선뼈와 육류 등 제수 음식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덩어리도 검출됐다.

“일본 고분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가 주목된다”고 조근우 연구원장은 설명했다.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고 말했다.


<-- 먹는 음식들과 제례 유물들 즉 장례풍습도 일본과 똑같다


<돌문짝(문비석)이 엎어진 채 드러난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석실 입구의 사다리꼴 현문과 내부 모습.

내부 석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4m를 넘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2m에 달하는 큰 공간이다.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깬돌을 차곡차곡 올려 벽체를 쌓는 고대 서일본 규슈지역의 무덤 석실과 얼개가 똑같다. >


<-- 일본과 게속해서 똑같다고 하는 우리나라 고고학자들과 역사 학자들


<무덤 석실로 들어가는 연도(널길 통로)의 들머리 부분 발굴현장. 토압에 따른 붕괴 위험에 대비해 윗부분 덮개돌 아래 금속지지대를 받쳐놓았다. >


장고봉 고분은 봉분 길이 82m(도랑 포함), 높이 9m에 이른다.

황남대총 등 신라 경주의 대형 고분보다 큰 국내 최대급 무덤이다.

겉모습은 일본에서 고대 국가가 정립될 당시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 모양새다.

전방후원분은 봉분의 앞쪽은 네모진 방형,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특징을 따서 일본 학자들이 지은 명칭이다.

일본 무덤 형식인 전방후원분이 고대 해상로 길목인 전남북 해안 일대에 10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은 1980~1990년대 잇따라 확인됐다.


일본 우파 세력은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라고 주장했다.

한·일 학계에서 묻힌 이의 출신지가 한반도인지 왜인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고분군보다 큰 고분

그리고 일본 우파들이 주장을 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

그런데 중국 문헌들인 삼국지 후한서 양서등과 심지어 호태왕비만 봐도 전라왜구 임나가 존재했다는 것이 다 나오며 임나라른 지명이 다 나옴

그리고 삼국사기만봐도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가 왜국(큐슈왜구+전라왜구 임나) 이 무려 42번이나 싸운 기록들이 나옴


<공중에서 내려다 본 해남 장고봉 고분의 전경.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전방후원분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뒤쪽 원형 봉분에 역 ㄱ 자 모양의 갱을 파고 석실을 드러낸 발굴 공간이 보인다. >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의 겉모습.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근 봉분 모양인 고대 일본 특유의 무덤 전방후원분의 전형적인 모양새다. >


<-- 일본과 똑 같은 전방후원분의 형태임

이건 한민족 무덤이 절대로 아님


장고봉 고분도 논란 속에 풍상을 겪었다.

80년대 초 학계에 처음 보고됐을 당시엔 자연 지형인 언덕으로 간주했다.

80년대 중반 강인구 전 영남대 교수가 발굴 허가를 신청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불허로 외형 실측밖에 할 수 없었다.

1986년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보존 조처가 제대로 되지 않아 90년대 두 차례 도굴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이 2000년 도굴 갱을 확인하고 긴급 시굴조사로 내부를 일부 확인했지만, 공식 발굴은 20년 뒤인 지난해 가을에야 시작했다.


<-- 도굴 당하도록 방치를 했고 영남대 교수가 발굴을 허가해 달라고 신청을 했는데 다 묵살을 한 정부 관계자들 ㅋㅋㅋ

그리고 도굴이 자꾸 되니 20년이 지나 이제서야 시작을 했는데….


하지만 무덤 석실은 2월 말 다시 묻혔다.

연구원 쪽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처로, 5~9월 무덤 주구(도랑)의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발굴의 파장도 고려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조사 내용은 한반도 전방후원분 무덤 주인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지난 20여년간 백제 정부의 통제를 받는 왜인 관료·용병이란 설과 일본에 이주했다가 현지 무덤 문화의 영향을 받고 귀국한 마한인 또는 백제인이란 설 등 여러 추측이 나왔다.

장고봉 고분에서 규슈 고분과 판에 박은 얼개와 철갑옷 조각, 철촉 등 무기류가 묻힌 사실이 확인된 건 국내 학계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일본 우파 학자들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 발굴 조사한다더니 다시 묻어버림

그리고 저렇게 큰 고분군이 어떻해?? 중국사인 백제의 통제를 받을 수가 있음??

저런 큰 무덤들을 만들려면 아주 강력한 세력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지

그리고 마한?? 아님

왜인들이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조사한 장고봉 고분의 주요 출토품들. 원래 묻은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당했으나 이번에 뚜껑 달린 토기 접시(개배)와 아궁이틀 조각, 철제 갑옷과 철촉의 파편 등이 상당수 나와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조언을 새겨볼 만하다.

“장고봉 고분은 왜계 무덤 구조를 갖고 있지만, 묻힌 이를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됩니다.

외형, 구조, 유물 등을 당대 정세와 함께 살펴봐야 해요. 민족주의를 넘어 고대인의 관점까지 생각하며 열린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 권오영 교수는 이제 말을 하기 바람

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큐슈왜구+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는 것을 말이지

언제까지 숨기고 은폐를 할 것임??


일본왕은 중국인이다(feat.오태백과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문신 풍습)

[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