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6, 2021

관산성 전투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feat. <삼국사기> 와 <일본서기>)

관산성에서 백제를 물리치다 ( 554년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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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해석:

관산성에서 백제를 물리치다 ( 554년 (음) )

〔15년(554년)〕 백제왕 명농(明穠)이 가야?[加良]와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飡)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혹은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 이 주병(州兵) 을 이끌고 나아가 서로 맞붙어 싸웠는데, 비장(裨將) 인 삼년산군(三年山郡) 의 고간(高干) 도도(都刀) 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대들이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4명과 사졸(士卒) 29,600명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삼국사기> 진흥매금대왕 조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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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武力爲新州道行軍揔管, 甞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해석 :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할아버지 [김]무력(武力) 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이 되어 일찍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백제 왕과 그 장수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斬首)하였다.

- <삼국사기> 김유신 태대각간 열전 상


성왕이 죽다 ( 554년 07월(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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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歩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謚曰聖.

해석 :

성왕이 죽다 ( 554년 07월(음) )

32년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성왕 조


百濟(백제) 聖明王(성명왕)의 戰死(전사) ( 554년 12월(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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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

百濟(백제) 聖明王(성명왕)의 戰死(전사) ( 554년 12월(음) ) 

겨울 12월 百濟(벡제)가 下部(하부)의 杆率汶斯干奴(간솔문사간기)를 보내 표를 올려 “百濟王 臣 明(백제왕 신 명)과 安羅(안라)에 있는 倭臣(왜신)들, 任那(임나) 여러 나라의 旱岐(한기)들은 아룁니다. 

斯羅(사라-신라)가 無道(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박-고구려)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미어거-みやけ(미야게) : 官家(관가))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有至臣(유지신)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斯羅(사라-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有至臣(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斯羅(사라-신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東方(동방)의 領(령)인 物部莫奇武連(물부막기무련)을 보내 자기 方(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函山城(함산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有至臣(유지신)이 데리고 온 백성 竹斯物部莫奇委沙奇(죽사물부막기위사기)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威靈(위령-명령)의 도움을 받아 이 달 9일 酉時(서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新羅(사라-신라)뿐이라면 有至臣(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狛(박-고구려)이 斯羅(사라-신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竹斯島(죽사도)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毾㲪(탑등) 1領(령), 도끼 300口(구), 사로잡은 城(성)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餘昌(여창-후에 위덕왕) 新羅(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耆老(기로-60이 넘은 노인)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餘昌(여창-후에 위덕왕)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大國(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新羅國(신라국)에 들어가 久陀牟羅(구타모라)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明王(명왕)은 餘昌(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新羅(신라)는 明王(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新羅(신라)에서 佐知村(좌지촌)의 飼馬奴 苦都(사마노 고도)에게 “苦都(고도)는 천한 奴(노)이고 明王(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고도)가 明王(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명왕)이 “왕의 머리를 奴(노)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노)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明王(명왕)이 胡床(호상)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知(곡지-고도)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明王(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苦都(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는 “新羅(신라)가 明王(명왕)의 頭骨(두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신라왕)이 明王(명왕)의 뼈를 北廳(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도당)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餘昌(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筑紫國造(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안교)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여창)이 國造(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안교군)”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新羅(신라) 장수들이 百濟(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日本 天皇(일본 천황)이 任那(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百濟官家(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긴메이 천황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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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