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0, 2021

중국 이민자 후손이자 과대포장되어진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었다 (feat. <조선왕조실록>)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1019_002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부절과 고서를 받다]

명나라 황제는 대감(大監) 황엄(黃儼)을 보내어, 정사(正使) 광록 소경(光祿少卿) 한확(韓確), 부사(副使)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부절(符節)과 고서(誥書)를 받들고 와서 왕명(王命)을 전달하게 되므로, 채붕(綵棚)을 매고 잡희(雜戲)를 베풀어 영접하였다.

임금은 편복을, 조신(朝臣)은 조복을 입고 모화루(慕華樓)에 나아갔다.

사신이 당도하자, 임금은 장전(帳殿)의 서쪽에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사신을 영접하여 장전 앞에 와서 말에서 내려 절(()를 받들고 장전에 들어가 용정(龍亭) 안에 고이 모시고 장전을 나오는데, 여러 관원이 앞을 인도하고, 사신은 절·고의 뒤를, 임금은 사신의 뒤를 따르고, 금고(金鼓의장(儀仗고악(鼓樂잡희(雜戲)는 다 평상의 의식과 같았다.

경복궁에 당도하자, 상왕은 궁문 밖에서 고명을 영접하고, 사신은 절·고를 받들고 근정전에 당도하니, 상왕은 전정(殿庭)에서 절·고에 먼저 절을 하고 악차로 들어갔다.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사신은 절()을 받들고 나가니, 임금과 상왕은 전정에 나가 공경히 전송하고, 여러 신하는 절을 인도하며 태평관(太平館)에 당도하여, 절을 북루(北樓) 위에 안치하였다.

상왕은 태평관에 와서 사신과 더불어 사례(私禮)를 행하고 수강궁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사례를 행하고 나와서 악차에 들러, 앉아서 여러 신하와 예를 행하였다.

예식이 끝나니, 한확(韓確)은 악차 앞에 와서 네 번 절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위로하고 안장 갖춘 말과 의복을 선사하였다.

임금이 사신과 더불어 행례할 적에, 한확은,

"감히 그럴 수 없다."

고 사양하는데, 임금이 강권하여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한확은 잔치에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한확은 본국 사람인데, 그 누이가 황제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까닭으로 황제는 영화를 보여 주기 위하여 북경으로 불러들여 고명을 주어 돌려보낸 것이었다.

- <세종실록 3, 세종 1 1 19일 갑자 2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


<--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선생들이 죽었다 깨나도 안 가르쳐 주고 교과서나 역사책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내용임

하여간 중국 이민자 후손인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였다


일본왕은 중국인이다(feat.오태백과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문신 풍습)

[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