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 2018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는 중국사다" 가 점점 굳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가 또 나옴

중국인이 왜백제 무덤서 찾은 ‘다문화 흔적’ (2018.08.19)

위에 뉴스 내용들을 한번 분석해 보자


먼저 우리나라 신문사 중에 하나인 한계레(일명 한걸레) 신문사 기자들의 지식이 얼마나 낮은지 알기 바람

먼저 제목에 다문화?? 다문화?? 흔적이래 ㅋㅋㅋ

역시 쓰레기 한걸레 기레기들은 못말린다니까 ㅋㅋㅋ


자 그럼 위에 뉴스 내용들의 분석을 한번 해 보기로 하자

<하남 감일동 굴식 돌방무덤 52

출토품•석실 얼개 전형적 중국풍

무덤 주인, 대륙 혼란기에 건너온듯>

<“전형적인 중국계 무덤입니다. 여기 살던 토착세력의 것들이 아닙니다.”백제 고고학 전문가인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무덤 내부를 보고 한마디했다. 주변의 학자들은 고민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끄덕거렸다.>

<-- 당연하지 백제(구다라)는 짱개 남조 한족놈들과 한사군의 하나였던 대방군(현 황해도)의 짱개 한족 잔당놈들 이 넘어와서 세운 왕조니까

당연히 첫 도읍지는 대방땅이였음

중국 문헌들에도 다 나옴

그리고 중국 문헌들에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의 시조가 "쿠태" 라고 나오지 온조비류는 전혀 안나옴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 <北史>

해석:

東明(동명) 후손에 仇台(구태) 있으니, 매우 어질고 信義(신의)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帶方(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

- <북사>


<지난달 18일 낮 폭염 속에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 백제석실분 발굴현장에서 열린 전문가 설명회는 흥분과 의문이 뒤섞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한성(서울)에 도읍한 4~5세기 초기 백제시대의 대형고분들이 전례 없이 쏟아져 나온 성과를 보면서 연구자들은 설레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무덤의 얼개와 출토품을 보니 주인이 중국계 이주민일 것이라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또다른 고민거리를 안게 된 것이다.>

<-- 4~5세기 아님

풍납토성에서 발견되어진 중국 남조 유물들을 중국 고고학자들과 역사 학자들이 중국 남조 시대 것들과 비교 분석 해 본 결과 동진 시대 후(420년 후)때의 유물들이라고 밝혔고 논문도 발표했었음(예로 왕즈가오 교수)

다시 말해서 5세기 초~5세기 중 후반때 유물들 밖에 안보인다는 것임


<유적은 고려문화재연구원이 2015 11월부터 하남시 감일동 공공주택지구 조성터에서 구제발굴 조사를 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수만평에 달하는 조성터에서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의 백제시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52기가 드러났다. 그동안 경기, 충청, 전라권 일대 백제 권역에서 나온 횡혈식 석실분은 70여기, 한성백제 석실분은 2000년대 이래 경기도 판교, 서울 우면동 일대의 고분군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꺼번에 시대 편년이 가능한 백제 석실분들이 나온 것은벼락같은 축복이자횡재라고 할 만했다. 출토품들도 획기적이었다. 호랑이머리와 닭머리가 물 따르는 주구에 달린 중국 동진의 청자 호수호, 청자 계수호가 처음 나왔다. 누금기법으로 만든 금제구슬, 망자를 기리려고 만든미니어처형식의 작은 토기인 명기들, 주둥이는 곧고 어깨는 넓직한 동진남조 스타일의 직구광견호 항아리 등도 출토돼 이 시기 백제계 고분과 출토품의 연대를 가리는데 결정적인 근거를 찾게 되었다.>


<-- 야 어떻해 거의 전부 짱개 남조 시대 유물들뿐이냐 ㅋㅋㅋ

그리고 전라권의 무덤들 특히 전라도 전남 지역의 무덤들은 거의 전부 일본식 전방후원분들과 옹관묘(독무덤)들이 수두룩 분포되어있지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의 무덤들은 거의 없음

그래서 전라도의 무덤들은 빼야함

참고로 전방후원분과 옹관묘(독무덤)는 전형적인 짱개 남조 오,월의 후손들인 왜인들의 무덤들임


<문제는 무덤 얼개가 전형적인 중국풍이란 점이다. 대개 평면을 장방형으로 조성하고, 사방벽면에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고 윗부분을 판돌로 덮은 석실 구조는 3~5세기 중국 동진남조, 한반도 서북 지역의 낙랑계 무덤에서 보이는 전축분(벽돌로 쌓은 무덤) 양식과 판박은 듯 닮았다. 한성백제 지배층의 핵심유적으로 꼽히는 서울 방이동, 석촌동 고분이 주로 돌무지무덤(적석총), 옹관무덤, 토광묘 양식인 것과는 크게 다르다.>

<-- 뭐가?? 크게 달라

돌무지무덤도 중국에서 받아들인 것이고 전형적인 일본식 무덤 양식인 옹관묘(독무덤)는 왜인들이 거기에 살았으니 나오는 거지

중국 문헌들에도 다 나옴

참고로 풍납 토성, 몽촌 토성등의 축조 기술도 중국이 기원임

그리고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와 짱개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이 세운 전라왜구+큐슈왜구와 짱개 남조 왕조들은 같은 편이였음

당연히 서열은 짱개 남조 왕조들>>>짱개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이 세운 전라왜구+큐슈왜구>>>짱개 남조 백제(구다라)

왜냐고?? 중국 문헌들, 일본서기, 삼국사기등에 다 나오니까


<권 교수나 박순발 충남대 교수 등 고고학계 상당수 전문가들은 감일동 고분의 이질성이 3~5세기 중국 대륙의 전란과 낙랑군 멸망 등을 계기로 백제에 들어온 중국계 이주민의 생활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당대 동아시아 혼란기에 다수의 유민들이 한반도에 뿌리내린 건 학계에서 공인된 사실이다. 백제에서 이들은 외교, 역법, 교육 등의 전문 직종에 종사하면서 자기네 특유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했다. 감일동 고분군은 그런 이주민 집단 일부가 전통과 습속을 지키며 남긴 생활문화의 흔적이라는것이다. 백제가 국가사업으로 외국 고급 두뇌유치에 나서, 중국의 전문인 집단을 데려와테크노크라트계층으로 육성하며 토착인들과 공존하게 했을 것이란 역사적 상상도 가능하다.>

<-- 상상을 하면 안되지

중국 문헌들에 짱개 백제(구다라) 왕들이 중국 남조 왕조들한테 기술자들, 학자들등이 필요하다며 요청해 중국 남조에서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  건너 갔다는 내용들이 다 나옴

그리고 우리나라 학자들도 이제 어느 정도 알고 있구만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가 정말로?? 한민족 역사가 맞나??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과 고고학자들 머리 열나게 아프겠네

또 짱개 한족놈들과 짱개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왜족놈들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넘어간 이유는 중국의 여러 전쟁들과 난들 때문임

팔왕의 난, 영가의 난비수대전등과 같은 사건들이 중국에서 일어났고 그 사이에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이 멸망했었음

영가의 난(311~312년 사이), 낙랑 멸망(313) <-- 야 어떻게 이렇게 딱 딱 맞아 떨어지는지

참고로 의자왕을 포박해서 혼혈 선비족계열 혹은 스키타이계열 왕조 당나라 장수 소정방한테 의자왕을 갖다 바친 예식진의 묘지명과 가족들 묘지명이 중국에서 발견되어졌는데 예식진의 조상이 중국 서진 말영가의 난(307~312)” 때 중국에서 백제(구다라)로 건너 왔다고 적혀져 있음


<이른바미니어처 토기로도 불리는 작은 크기의 토제품들. 부뚜막이나 여러 항아리 모양을 축소시켜 만든 것으로 망자가 내세 생전과 같이 생활하기를 기원하며 넣는 명기에 해당한다. 이런 소형 명기를 넣는 것은 당대 중국 동진과 남북조의 장례 풍속이다.>

<-- 무덤 양식도 중국풍, 유물들을 무덤에 넣어서 기원하는 풍습도 중국풍, 사마왕의 매지권(도교 사상)등도 중국풍 다 중국풍

아 중국 화폐인 오수전 또한 사마왕릉 매지권 앞에 놓여 있었음

그리고 양직공도에 백제(구다라)와 고구려의 의복과 언어가 중국과 비슷하다고 나옴

또 짱개 남조 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대통사(大通寺)라는 사찰까지 세우는 벡제(구다라)

참고로 대통(大通)은 중국 양() 무제(武帝)의 세 번째 연호.로써 527 3월에서 529 9월까지 2 7개월 동안 사용한 연호임


<옛 문헌 기록들을 봐도, 외국인의 이주와 활동이 당대 백제의 왕성한 국제교류와 개방성에 비춰 전혀 이례적이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국 수나라 사서 <수서> ‘백제전을 보면, 백제 주민 가운데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중국인이 숱하게 섞여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속일본기>에는 6세기 왜국에 <논어> 등 유교경전을 전해준 백제 박사 왕인이 한나라 고조의 후예로 백제에 귀화한 중국인 왕구의 손자였다는 구절도 등장한다. 왕씨, 진씨, 고씨 등 중국계 성을 지닌 이들이 백제 조정에서 외교행정 관료로 일하면서 업적을 쌓은 내용들도 묘지명이나 중국 문헌들에 상당수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고구려, 신라의 문헌기록에는 특별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민족, 국적 가리지 않고 가장 적극적인 다문화 다민족 포용 정책을 쓰면서 이주민들의 기술과 역량을 국가의 운영에 십분 활용했던 셈이다. 최근 제주도의 예멘 난민 수용 문제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일었던 후대의 현실에 견주어 고대 타자에 대한 관용과 상생을 증언하는 감일동 석실무덤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선례임에 틀림없다.>

<-- 응 대부분이 짱개 한족들이였음

그리고 다음으로 많은 족들이 짱개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이 세운 전라왜구+큐슈왜구놈들였고...

또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는 국제적인 나라가 아니였음

오직 짱개 남조 왕조들을 위해서 존재했던 왕조였음

국제적인 도시는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훈족(흉노) 가야 부여 진국 삼한 금나라 청나라 그리고 아메노 히보코(이즈모) 포함)였지

경주(금성 혹은 건모라)에 나오는 유물들이 다 말해 주잖아??

예로 황금보검, 중동 상인의 모습을 한 토우들, 로만 글라스, 인면 유리구슬등

그리고 왕인은 가공의 인물임

중국에서 천자문이 만들어지지도 안았던 시대인데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 줬다던 그 왕인??

오직 <일본서기> 에만 나오는 왕인

그런데 왕인도 중국인임

왕씨가 중국 성씨임

그리고 역시 한걸레 기레기답게 이 문제를 지금 개슬람 난민들과 연결시킴

진짜 골때림

이래서 한걸레가 쓰레기 신문사라는 것임


하여간 이제 정식으로 밝힐때가 다가오고 있음

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구다라)는 중국사라는 것을...

그런데 지금 중국도 차곡차곡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를 중국사로 편입시키고 있음


그리고 최근 뉴스들

고구려에 이어 백제까지 중국사에 편입했다 (2017.09.13)


"동북공정 이후  백제사 연구 확대·구체화" (2018.07.17)



드디어 중국이 짱개 남조 백제(구다라)를 지들 역사로 편입하기 시작했음

위에 뉴스 내용들은 시간나는대로 분석을 해 보겠음

일본왕은 중국인이다(feat.오태백과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문신 풍습)

[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