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8, 2020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 - 3탄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③…5세기말 완전 철수 (2019.05.21)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7

신라를 가장 괴롭히던 왜…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한반도에서 손 떼

시기 6세기 이전에 신라를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가 왜였다.

<삼국사기>에는 시조인 혁거세 8년부터 왜의 침입 기사가 나온다.

왜와 관련한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무려 50차례 가까이 나온다.

이중 대다수가 침략 기사다.

신라를 괴롭힌 왜가 한반도 왜인지, 일본열도 왜인지에 대한 뚜렷히 구분하기 어렵다. 

별도로 움직였을 때도 있었고, 서로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행동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게 왜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다.

네차례나 수도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백성 1천명을 끌고 가는 침략 세력이었다.

임금의 동생을 볼모로 잡았고, 툭하면 대신의 딸을 왜왕에게 시집오라고 했다.

신라 임금이 왜의 공격을 받고 고민하는 장면을 <삼국사기>를 통해 들어 보자.


<① 유례 12년(295년),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해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다.

백제와 도모해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늘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임금이 받아들였다.


② 흘해 37년(346년), 왜병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했다. 

또 진군해 금성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했다.

임금이 싸우고자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은 멀리서 왔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면 공격을 늦추어 그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이 받아들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이 식량이 떨어져 물러가려 하니, 날쌘 기병으로 추격토록 해 쫓아버렸다.


③ 실성 7년(408년), 임금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두고는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정예 병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했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어떠 하겠습니까?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니, 지세가 험한 곳에 관문(關門)을 만들고 적들이 오면 막아, 그들이 침입하여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다가 유리한 시기가 되면 나가서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은 끌어당기고 남에게 끌려 다니지는 않는 것이니, 최상책이라 하겠습니다.”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왜의 공격에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도인 금성을 지켜 농성하고, 왜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수세적인 방법을 취했다.

신라는 물의 싸움(水戰)에 약했다.

임금도 이를 인정했다.

바다를 건너가 선제 공격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관문을 지켜 왜병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냥 당하기만 하던 신라는 5세기 들어 해상 전략을 강화해 나갔다.

자비 임금은 즉위 6년(463년)에 담당관에 명해 전함을 대대적으로 수리케 하고, 지증왕 6년 (505년)엔 선박이용의 제도(舟楫之利)를 정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륙이 아니라, 해안에서 왜의 침공을 저지했다.

실성 14년(415년), 신라 수군이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512년 이사부 장군이 바닷길을 건너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물을 두려워 하던 신라 수군으로선 엄청난 발전이며, 신라군에 바닷 싸움(해전)에서 자신감을 얻게 한 전투였다.

왜는 고구려와 신라의 힘이 강해지면서 서서히 한반도에서 빠져 나갔다.


한반도 왜의 첫 번째 타격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10년(400년) 보병과 기병으로 무려 5만 병력을 보내 신라를 구원케 했다.

고구려군이 서라발에 이르러, 그곳에 가득한 왜군을 쳐 퇴각시키고, 왜의 동맹세력인 임나(任那)가야의 종발성(從拔城)까지 진군해 성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반도 왜는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 같다.

두 번째 타격은 신라 이사부였다.

이사부는 지증왕 13년(512년) 우산국을 정벌하고, 동해 제해권을 쥐면서 동해안 일대에 대한 왜의 노략질을 차단했다.

아울러 이사부가 왜의 동맹세력인 금관국을 정벌해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남해안 일대에 대한 해상 지배력도 확보하게 됐다.

신라가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자, 열도와 한반도 왜 사이에 수송로가 끊기고, 이에 따라 한반도 왜는 퇴로 차단에 앞서 열도로 넘어갔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에서 왜와 관련한 기사는 신라 소지왕 19년(497년), 백제 비유왕 2년(428년) 이후 사라진다.

5세기말쯤 한반도 왜가 거의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고, 잔류한 왜인들은 백제, 나중엔 신라에 동화돼 간 것으로 보인다.

160년간 우리 사서에서 사라졌던 왜가 662년 다시 나타난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열도의 왜는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5만 수군을 동원해 상륙하려다 백마강(금강) 어귀에서 전멸했다.

<문무왕 2년(662년), 손인사와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고 바닷물도 붉게 물들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에는 백강전투 장면을 짧게 소개하며,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덥고 백마강이 붉게 물들었다”며 전투의 치열함을 짧게 표현했지만, <일본서기>에는 울분을 삼키며 백촌강 전투(白村江の戦い) 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왜는 더 이상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며 영토를 열도로 국한시켰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은 왜의 침입에 대비해 죽을 때 자기 무덤을 동해 바다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서였다.


<-- 참고로 신라 소지매금대왕때 전라왜구 임나가 사라졌는게 아님

왜국과 백제와 이들의 대'빵인 중국 남조 왕조들은 같은 편이였기에 이들은 서로서로 도와주던 관계였음 

전라왜구 임나가 562년때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한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주 잔인하게 몰살을 당해 멸망을 당했다라는 기록이 <일본서기> 에 나오는데 그런데도 대빵인 중국 남조 왕조들과 백제와 왜국은 한편이라 이 전라왜구 임나의 잔존 세력들은 여전히 전라왜구 임나 지역에 남아 있었음

663년의 백강 전투 혹은 백촌강 전투를 끝으로 전라왜구 임나는 중국사인 백제와 함께 완전히 멸망을 함


Sunday, December 27, 2020

공주 송산리 6호분 축조자는 중국인이다

"공주 송산리 6호분 축조자는 중국인" (2008.12.29)

https://www.yna.co.kr/view/AKR20081227045000005

"공주 송산리 6호분 축조자는 중국인"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 양식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서, 웅진도읍기 백제왕릉임이 확실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6호분은 양(梁)나라에서 파견한 기술자의 총감독 아래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려대 고고환경연구소 조윤재 연구원은 일제시대 송산리 6호분에서 출토된 전돌 명문을 종래에는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고 판독하고 "양나라 관아에서 쓰는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해석했으나 이를 '梁宣以爲師矣'로 읽고 그 의미를 "양나라 사람인 선(宣)을 스승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중략)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 양식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서, 웅진도읍기 백제왕릉임이 확실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6호분은 양(梁)나라에서 파견한 기술자의 총감독 아래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중략)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 양식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서, 웅진도읍기 백제왕릉임이 확실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6호분은 양(梁)나라에서 파견한 기술자의 총감독 아래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공산리 고분군 현지 기념관에 전시 중인 6호분 모형 단면도.현실로 통하는 무덤길을 별도로 마련한 전형적인 중국식 전축분(벽돌무덤)으로 현실 네 멱면에는 사신도를 그렸다. 

조 박사는 한국호서고고학회 기관지로 최근 발간된 '호서고고학' 19집에 기고한 '공주 송산리 6호분 명문전(銘文塼) 판독에 대한 관견(管見)'이란 논문에서 종래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고 판독하고 "양나라 관아에서 쓰는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온 벽돌 명문을 새롭게 해석했다.

즉, 그에 의하면 기존에 '瓦'로 판독한 글자는 '以'(이)로 읽어야 하며, '官'이라는 글자도 '宣'(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판독에 따른다면 문제의 벽돌 명문은 '梁宣以爲師矣'가 되고, 그 의미는 "양나라 사람인 선(宣)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되며, 이는 결국 "양나라 사람인 선이 분묘의 축조를 감제(監制.감독)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조 박사는 이를 통해 "(송산리 6호분의) 고분 축조 책임자의 국적과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한 셈이다"고 평가했다.

이런 판독은 송산리 6호분과 봉분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거의 똑같은 벽돌무덤으로 1971년 기적적으로 발견되고 발굴된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의 축조 책임자 또한 중국 양나라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연결될 수 있어 주목된다.

한국학계에서는 대체로 중국 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입한 백제인이 축조한 것으로 보지만,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 기술자 파견설을 지지하는 견해가 많다.

(후략)

Sunday, December 20, 2020

중국사인 백제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원조가 바로 3세기 중국 동오(東吳) 시기의 묘인 주연(朱然)묘이다

'아치형 지붕'서 찾은 백제만의 부드러움 (2009-11-27)

http://www.joongdo.co.kr/web/view.php?key=20091126000000057

<중국속의 백제문화> 6. 무령왕릉속의 독창적 문화인

위의 뉴스를 내용들을 살짝 한번 보기로 하자

(중략)

백제문화의 국제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무령왕릉은 중국 육조시대(265~589년)의 묘제와 같아 계보적인 연원이 중국에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아치형 천정을 구축한 무덤은 중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 백제만의 독창적인 사례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물론 중국 육조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인 주연묘에서 아치형 지붕을 채용한 사례는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주연묘 및 육조석각 등을 통해 중국 묘지문화와 무령왕릉의 독창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아치형지붕을 채용한 주연(朱然)묘=동오(東吳)시기의 3세기 묘 가운데 하나인 주연묘는 벽돌무덤으로 난징(南京) 인근 안휘성 마안산시에 위치한다.

중국은 마안산에서 육조시대 무덤만 100여기 발굴했으며 이 가운데 대표적인 무덤이 바로 오나라 장군인 주연묘와 동오묘다.

특히 마안산시가 지리적으로 난징과 가까운 위치로 인해 문화계승에 있어서 닮은 점이 많은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지난 1984년 발굴된 주연묘는 한 무덤 안에 주연의 관과 부인의 관이 함께 안치돼 있다.

무령왕릉의 경우 왕과 왕비가 함께 안치돼 있는 것과 흡사하다.

(중략}

무령왕릉의 문이 1개인데 비해 주연묘는 2개의 문으로 돼있다.

이곳(오나라 주연묘)에서는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채색청자기를 비롯해 청자반구대, 청자양, 청자호자, 청자향로 등 모두 50여 종의 부장품들이 출토됐다.

칠기 종류만 80여점에 달한다.

백제시대 유물들과 흡사해 당시의 문화적인 교류를 짐작케 해준다.

마구간과 돼지우리 등 가축과 가축우리를 흙으로 만들어 무덤에 함께 매장했으며 진묘수와 동다리미 등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출토된 부장품들도 눈에 띈다.

(중략)

안휘성 마안산 동오묘에서 출토된 석지권(錫地券)의 경우 무령왕릉의 매지권과 흡사하다. 

(중략)

무령왕릉의 널길 한 가운데에서 발견된 진묘수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물론 국내 고대 무덤에서도 널길의 좌우 벽에 그림으로 괴수(怪獸)를 나타낸 예는 있지만 이처럼 진묘수를 제작해 세운 예는 없으므로 이 유물의 유례는 역시 중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중략)

또 부여박물관 이용현 학예연구사는 “무령왕릉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중국의 다양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실생활에 적용함은 물론 일본 등 주변국에 전파하는 등 동아시아의 허브적인 역할을 한 고대국가가 바로 백제”라고 지적했다.


Monday, December 7, 2020

일본왕은 중국사인 백제(쿠다라) 혈통이 100프로 아니다 (feat. 우리나라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일본 천황은 정말 '백제의 후손'인가? (2020.02.12)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21

먼저 위에 뉴스는 일본왕과 일본 사람들은 중국사인 백제의 후손들이 아니다 라는 뉴스 내용임

하여간 위에 뉴스 내용중에 이런 내용들이 나옴

<(중략)

이와 관련하여 역사 연구자들은 일찍이 2001년 기자회견 직후부터 "아키히토 천황의 발언이 천황 가문 백제 유래설로 바로 연결되지 않음을 지적해온 바 있다,"

김현구 당시 고려대 교수는 현재 천황 가문이 백제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적잖이 회자되어 왔지만 확증은 없고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견해들이어서 역사 연구자 입장에서는 학문적인 성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았다.

또한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계라는 것은 학계에서도 사실로 인정하고 있지만 "다른 천황들까지 한반도 이주민이라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하였다."

 (후략)>

어머니쪽 한명이 백제계였음

왜국의 큐슈  지역에서 태어나 40년간 그 곳에 살다가 왜왕이 내 준 왜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왜왕이 너 백제에 가서 백제왕 해라고 해서 백제왕들을 한 동성왕과 사마왕(무령왕)

그래서 그런지 사마왕(무령왕) 이 지 딸을 왜왕의 후궁으로 바쳐서 왜왕의 자식을 놓았는데 이걸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왜국은 백제의 후손이고 백제가 넘어가서 왜국을 만들었다라고 자학적 해석을 하고 거짓말을 했음

자 그러면 그러면??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김씨 왕족들이 왜왕의 딸과 결혼하면??

이제 신라는 왜국의 나라인가??

입만 열었다하면 거짓말 남탓 역사왜곡등을 밥 먹듯이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한국내 한국말 잘 하는 45프로 중국 이민자 후손들

하여간 왜남공정이 따로 없고 일본 극우들이 주장을 하고 있는 "일선동조론" 에 옹호를 해 주고 있는 사람들은 뭐다??


일본 천황의 혈통 고백 (백제 사마왕(무령왕)) <-- 제목이 참으로 희한하다

https://youtu.be/4T8SeUnkDLA

여기 동영상에서 퇴임한 아키히토 일본왕이 이런 말을 함

"간무 천황(737~806)의 어머니가 중국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의 사마왕(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라고 말하고 있음

후손이라고 말하는 내용은 전혀 없음

이걸 우리나라에서는 왜왕의 조상이 중국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다라고 주장을 하고 확대 해석을 했음

참 한심하지 안을 수가 없음

그럼 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전라왜구(임나)+큐슈왜구 즉 왜국의 왜왕 딸이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로 보내져서 김씨 왕족의 왕과 결혼하면 일본놈들이 이러겠네??

신라는 일본의 조상?? 이다라고 이해하겠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 승리를 참 잘함

다시 말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왜왕이 왜군들을 내줘서 중국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에 가서 왕하라고 해 백제왕들을 한 인물들이 바로 동성왕, 사마왕(무령왕)등임

그리고 동성왕 다음에 그 사마왕(무령왕)이 지 딸을 왜왕한테 후궁으로 보냈것 뿐임

또 왜왕은 항상 후지와라 가문과 결혼을 했음

그런데 말이야

중국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는 중국 남조 왕조들과 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전라왜(임나)+큐슈왜구 즉 왜국의 신하 나라였고 이 두 나라(왜국과 백제)는 중국 남조 왕조들의 신하 나라들이였음

왜냐고?? 한중일 기록들에서 그렇게 다 나옴

즉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도 다 나오고 고고학적으로도 다 밝혀지고 있는데 애써 부인할려고 하는게 참으로 안타까움

다시 말해서 중국 남조 왕조들(대빵)>>>>>>>>>>>>>>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전라왜구(임나)+큐슈왜구 즉 왜국>>>>>>>>>>>>>>>중국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 승리를 참으로 잘함

그런데 문화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인류사학적으로 고구려 백제는 중국사들이며 전라왜구 임나는 일본사이기에 이 세 나라는 한민족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임


한반도 호랑이의 씨를 말려버린 장본인은 다름아닌 조선인들이였다

 <조선 호랑이는 어떻게 멸종했나 - 일제의 조선 호랑이 사냥 기록 (2014.04.14)>

 https://www.huffingtonpost.kr/2014/04/14/story_n_5144548.html

위의 내용중에 이런 내용이 있음

<눈길을 끄는 건, 3명을 뺀 사냥꾼 모두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냥꾼이 모두 동원됐는데, 호랑이 100마리를 쏘아 호랑이 사냥의 일인자로 꼽히던 강용근, 강용근과 함께 조선왕실이 공인한 엽사로 하루에 꿩 106마리를 잡은 기록을 갖는 이윤회 등이 포함됐다.

다른 포수가 화승총을 쓰던 시절이었지만 이 둘은 엽총을 사용했다.

당시 조선의 포수는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사격 실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구식 단발 엽총으로 호랑이 같은 큰 맹수를 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급소를 단번에 맞춰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면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조선시대부터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를 따로 두어 정책적으로 지원한 것도 작용했다.

이들이 정호군의 핵심을 이뤘지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기에 급급했지 일제에 이용당한다는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멈칫거림도 이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원정대는 조선총독부의 하세가와 총독을 만나는 등 일제 당국의 비호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지역 행정당국과 유지가 주최한 성대한 환영행사가 벌어졌다.>


<한국호랑이는 언제, 왜 사라졌을까(2009.12.29)>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396050.html

 위의 뉴스 내용중에 이런 내용이 나옴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말살한 책임은 일제에 있는 걸까.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이 책 기획편집 후기에서호랑이 절멸의 책임을 일제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이 결정타를 가했지만, 이미 호랑이 개체수는 체계적인 호랑이 포획 정책을 편 조선시대 동안 급감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호랑이가 살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렇다

일제 전에 벌써 거지 노예국가 500년 중국의 개였던 중국 출신 이성계(아기바토르) 의 이씨 조선에서 체계적인 호랑이 포힉 정책을 펴서 현저히 급감을 하고 있었음.

그것도 "착호갑사(捉虎甲士)" 라는 전문 호랑이 사냥꾼들 두고서

조선왕조실록과 다른 기록들을 봐도 매해 200명 넘게 호랑이로 인해 죽음을 당한 조선인들

심지어 궁궐까지 들어왔다고 함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 이 호랑이들의 씨를 말리기위해서 전문 사냥꾼들을 고용해 호랑이들을 잡아서 점점 그 개체수는 급감했고 결정타가 바로 6.25 전쟁이였음

그런데 호랑이한테 잡아 먹혀봐야 정신을 차릴건지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조건 기승전 일본 탓 남 탓임

호랑이를 잡아줘도 지랄 안잡아도 지라랗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 안좋은 성격 성질은 계속 될 것임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 - 2탄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②…반남 고분 미스터리 (2019.05.20)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3

나주는 한반도 왜의 중심?…한반도에서 일본식 전방후원분 존재 논란

<삼국지 동이전>과는 별도로 국내 사학계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일본식 무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와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1972년 고려대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던 윤세영이 충남 부여 규암면 합송리의 구릉 네곳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에도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다.

전방후원분은 4~6세기 일본에서 성행했던 무덤양식으로, 평면도 상으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열쇠구멍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어로는 ‘keyhole-shaped tomb’이라고 번역하며, 국내에서는 장고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장고형 고분’이라고 한다.

윤세영의 주장으로 국내 고고학계는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고, 정부는 전문가들을 불러 문화재위원화를 개최했다.

위원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또다시 일본식 무덤 논쟁의 불을 지핀 사람은 1983년 강인구 영남대 교수였다.

강인구 교수는 경남 고성과 함안, 경북 고령, 전남의 나주, 영암, 무안, 함평의 고분들이 장고분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외형만 전방후원분일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본 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논쟁의 대상이 됐던 고분 중에서 부여와 고성의 고분은 나중에 장고형 고분이 아니라는 학계의 결론이 났다.

1980년대 후반엔 전남 함평 일대, 영암 일대, 광주 일대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연이어 발견됐다.

한국고고학계에서도 더 이상 장고형고분, 즉 일본식 정방후원분이 한국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영산강 유역에서 10여기 이상의 장고형 고분이 발견됐다.

이제는 일본식 무덤이니, 단순한 자연구릉이니 하는 논쟁도 사라지고,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초점이 넘어갔다.

전라도 일대 전방후원분에 대한 조사는 일제때부터 시작됐다.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30여기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반남고분군이다.

그곳의 고분이 겉모양에서 일본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에 착수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1918년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반남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1차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겉모양은 원형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중략)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중략)

그에 따르면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등 5도호부와 대방주(對方州)를 설치했는데, 대방주가 과거 왜의 세력이 설치한 주(州)였다.

대방주의 중심현은 나주 회진현이며, 반나현이 지금의 반남현이다.

따라서 반남고분군의 주인공이 바로 한반도 왜의 지배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영산강 일대의 한반도 왜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쌓이면서 <삼국사기>의 의문점이 조금은 풀린 듯하다.

벌휴이사금 때 호남지방에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 굶주린 한반도 왜인 천여명이 영남지방으로 몰려가 유민으로 떠돌았고, 영산강 유역의 왜가 소백산을 넘어 사신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신라를 침공해 수백, 수천의 신라인을 잡아 육로로 끌어와 노비로 부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 - 1탄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①…의문 제기 (2019.05.19)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8

삼국사기의 모호성삼국지 동이전 해석 통해 호남 지역가 존재했을 가능성

사서를 뒤적이다 보면 의문이 드는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하나가 한반도 남쪽에 왜족가 있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이 맞다는 얘기인가.

질문은 의문에서 시작한다.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가능한 한 납득할만한 수준까지 사료의 혼선에서 빚어지는 의문을 풀려고 여러 역사전문가들의 견해를 찾아보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삼국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쪽에 왜가 큰 세력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략)

첫째,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와 관련한 기사에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온다.

<① 벌휴 10(193) 6, 왜인이 크게 굶주려, 식량을 구하러 온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됐다.

② 아달라 5(158) 3, 죽령을 열었더니, 왜인이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시기의 왜인 구걸 기사는 바다에서 건너온 것 같지 않다.

1천명이나 되는 많은 왜인이 식량을 구걸하기 위해 육지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바다를 건너 올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의문이 남는다.

아달라이사금조의 왜인 사신 기사는 경북 풍기와 충북 단양 사이에 있는 죽령 길을 개척했는데, 백제나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어야 하질 않을까.

그런데 이 기사는죽령이 열렸다는 기사와왜인이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는 별도의 사건으로 분리하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 왜의 사신이 죽령을 넘어 예방한 사실의 기사임을 배제할 수 없다.

(중략)

중국 서진 시대 중국인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이런 의문의 답을 구할수 있다.

몇구절을 보자.

<①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로 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경계를 접하니, 면적이 사방을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는데 그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가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이다.

②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편평하다.

왜에 인접한 곳의 남녀들 또한 문신을 한다.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

<삼국지 동이전> 3세기 후반에 중국인이 동이족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기행담을 모은 사서로, 12세기에 사료를 모아 쓴 <삼국사기>보다 사실에 근접해 서술했다고 볼수 있다.

당대의 기록이 1천년 후의 기록보다 정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서 한의 남쪽에 왜와 접해 있고, 진한과 왜가 가까이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고 하질 않는가.

그렇다면 3세기에 한반도에 왜가 존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는왜인들이 문신을 하는데, 나라마다 각기 다르다는 기사가 있는데, 왜와 가까이 있는 진한의 남녀가 문신을 따라했다는 기사에 설득력이 있다.

상식적으로 왜는 일본 열도에 있어야 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서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해 국읍을 이루고 있다고 해, 일본 열도가 왜인의 본거지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동이전> 한조에서 말하는 왜는 일본 열도의 왜와 별도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삼국지 동이전>의 기사가 맞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한반도에 존재한 왜의 위치는 어디일까.

마한은 서쪽에 있다고 했고,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마한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이고, 변한은 부산 경남 지역이며, 진한은 경상북도 지역과 대체로 겹친다.

그러면 한(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과 남쪽으로 접하고, 변한의 한 국가인 독로국과 접하며, 진한과 가까운 곳은 바로 전라도 지역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호남 일대에 왜가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포인트 문장


Sunday, December 6, 2020

민주당의 전신이 바로 친일파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 의 후예들이다

한국민주당(한민당 - 지금 민주당의 전신)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B%AF%BC%EC%A3%BC%EB%8B%B9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은 1945년 9월 16일 결성된 극우정당으로, 사회운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제외하면 한국독립당과 함께 미군정기의 양대 우익정당이었으며, [대내외적으로 호남지역주의 친일파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 키 포인트


'계륵' 민주당, 넌 누구냐? (2010.08.06)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6449#0DKU

[민주당 대해부①] 정체성 분석…'중도' 넘어 '진보적 자유주의'로

한민당에 뿌리를 둔 민주당의 변천사 

(중략)

[알다시피 민주당은 역사적으로 해방 공간에서 존재했던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 키 포인트임

(중략)


조순형·정대철의 '민주당 해체' 반대 이유 (2003.09.0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41488

(중략)

신주류의 발전적 해체 방침 철회는 구주류쪽 박상천 최고위원이 제기한 '민주당 정통성론'에 대한 반박 부재에 기인한 점도 있다.

[사실 민주당의 뿌리는 해방 공간에서 지주 세력의 이익을 대변했던 '한국민주당'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 키 포인트

한국민주당이 민주국민당을 거쳐 신익희·조병옥 등이 참여한 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으니 기실 타당성이 있는 지적이다.

(후락)


민주당의 뿌리는 어디일까…김성수·신익희·DJ? (2017-09-19)

https://raythep.mk.co.kr/newsView.php?cc=270000&no=14754

◆인촌 김성수

'민주당의 뿌리'와 관련해 '인촌(仁村) 김성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891년 전북 고창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일제시대 그는 각 분야에서 활약했다. 

1915년 중앙학교 인수를 시작으로, 1919년에는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했다. 지주에서 교육자와 기업인의 길을 가기 시작한 것.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해 언론사주를 겸했고,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지금의 고려대학교로 만들었다.

[그가 광복 이후 송진우 등과 협력해 만든 정당이 바로 한국민주당이다.] <-- 키 포인트

[한국 현대사에서 '친일파 지주세력'의 정당으로 통하는 정당으로 민주당의 깊은 뿌리다.] <-- 키 포인트

[민주당이 문재인 대표 시절 발간한 '민주당 60년사'에서 "한민당의 핵심 간부 중에는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행위자들이 다수 자리 잡고 있었다(16쪽)"는 언급이 나온다.] <-- 키 포인트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