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7, 2020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 - 2탄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②…반남 고분 미스터리 (2019.05.20)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3

나주는 한반도 왜의 중심?…한반도에서 일본식 전방후원분 존재 논란

<삼국지 동이전>과는 별도로 국내 사학계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일본식 무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와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1972년 고려대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던 윤세영이 충남 부여 규암면 합송리의 구릉 네곳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에도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다.

전방후원분은 4~6세기 일본에서 성행했던 무덤양식으로, 평면도 상으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열쇠구멍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어로는 ‘keyhole-shaped tomb’이라고 번역하며, 국내에서는 장고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장고형 고분’이라고 한다.

윤세영의 주장으로 국내 고고학계는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고, 정부는 전문가들을 불러 문화재위원화를 개최했다.

위원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또다시 일본식 무덤 논쟁의 불을 지핀 사람은 1983년 강인구 영남대 교수였다.

강인구 교수는 경남 고성과 함안, 경북 고령, 전남의 나주, 영암, 무안, 함평의 고분들이 장고분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외형만 전방후원분일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본 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논쟁의 대상이 됐던 고분 중에서 부여와 고성의 고분은 나중에 장고형 고분이 아니라는 학계의 결론이 났다.

1980년대 후반엔 전남 함평 일대, 영암 일대, 광주 일대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연이어 발견됐다.

한국고고학계에서도 더 이상 장고형고분, 즉 일본식 정방후원분이 한국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영산강 유역에서 10여기 이상의 장고형 고분이 발견됐다.

이제는 일본식 무덤이니, 단순한 자연구릉이니 하는 논쟁도 사라지고,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초점이 넘어갔다.

전라도 일대 전방후원분에 대한 조사는 일제때부터 시작됐다.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30여기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반남고분군이다.

그곳의 고분이 겉모양에서 일본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에 착수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1918년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반남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1차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겉모양은 원형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중략)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중략)

그에 따르면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등 5도호부와 대방주(對方州)를 설치했는데, 대방주가 과거 왜의 세력이 설치한 주(州)였다.

대방주의 중심현은 나주 회진현이며, 반나현이 지금의 반남현이다.

따라서 반남고분군의 주인공이 바로 한반도 왜의 지배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영산강 일대의 한반도 왜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쌓이면서 <삼국사기>의 의문점이 조금은 풀린 듯하다.

벌휴이사금 때 호남지방에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 굶주린 한반도 왜인 천여명이 영남지방으로 몰려가 유민으로 떠돌았고, 영산강 유역의 왜가 소백산을 넘어 사신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신라를 침공해 수백, 수천의 신라인을 잡아 육로로 끌어와 노비로 부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