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명량해전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벌어진 전투이며 여기에 참가한 일본 장수들은 전부 일본 무명 하급 장수들이였음
그리고 당사자인 거지 노예국가 이씨 조선은 강화 협상에 끼지도 못 했음
칠천량 해전의 대패와 명량해전때 이순신의 후퇴 도망 그리고 그 전(칠천량 해전 전)에 가토 기요마사의 적은 수 병력들(칠전량 해전때보다는 훨씬 적은 약 250척 혹은 300척 정도였음)을 무사 통과 시켜주는 바람에 전라도가 엄청나게 초토화 되어져 버림
정유재란(게이초노에키)때 가토의 병력 수 - 10, 000명~15, 000명 정도
정유재란 발발전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순신한테 가토 기요마사의 예상 상륙 지점, 날짜, 시간등까지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줬는데 이순신이 이를 무시(함정?? 이라고 생각했음)하고 막을 수가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을 무사 통과시켜 줘 버렸음(그 당시 고니시와 가토는 사이가 정말 안 좋았음 -- 이것도 몰랐던 이순신...적들의 이간질도 못시킴)
다시 말해서 고니시가 친철하게 가토의 상륙 지점, 날짜, 시간등까지 알려줘서 이를 전해 들은 조정에서 가토 수군을 공격해 부산에 상륙하는 것을 막으라고 이순신한테 여러 차례 지시했는데도 단독으로는 무리?? 라고 생각하고 소극적이였음
그 결과 가토 기요마사 병력들은 거의 아무런 저항없이 부산에 무혈로 그냥 입성함
조정에서는 가토 병력을 무사 통과시켜 준 이순신을 군법에 회부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함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약 250척 혹은 300척 정도)들을
무사 통과시켜줬고 그 다음에 오는 더 많은 일본 수군들을 원균, 이억기, 배설등한테 막으라고 하는 조정
그래서 칠천량 해전은 대패 한 것임
<칠천량
해전때 일본 수군 병력 : 500~1000척 정도 약 14만~15만 병력
조선 수군 병력 : 120~169척
정도>
참고로 원균은 수륙 양면으로 동시 출격을 해야 저 많은 일본 대군들을 막아 낼
수가 있다고 했지만 무시를 당하고...
그 반대로 일본이 수륙 양면 작전을 세워 공격을 함
하여튼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 왈 : 전라도는 남김없이 모두 한번에 쳐라
그 결과 전라도 사람들이 무려 15만명 이상 학살을 당했고 코와 귀가 베여지고 심지어 일본군들이 개 목걸이를 해서 일본으로 포로로 끌고 갔음
그리고 그 조선인 포로들을 일본에 무역하러 정박해 있던 서양 외국인들한테 노예로
팔아버림 -- 예전 kbs 역사 저널 그날에도 다 나왔음
하여튼 명나라 심유경의 거짓 보고로 인해서 정유재란(게이초노에키)이 다시 일어나는데...
태합은 정유재란때 전라도를 초토화 시킬려고 작정하고 개시한 전쟁이였음
그런데 명량해전을 대첩?? 이라고 하는데
왜?? 나머지 일본군 병력들(해군+육군)은 그대로였을까??
왜냐면?? 이순신 지가 직접 쓴 난중일기(지 주관적인 사관이 다분히 많이 들어있는 일기) 에도 선봉부대인 작은 중형배인 세키부네 30척(일본측은 수십척 정도) 정도만 당파하고 북쪽으로 후퇴 도망을
쳐서 1년 동안 짱박혀 있었기 때문임
참고로 세키부네는 약 30명~40명 정도 탈수 있는 배임
참고로 세키부네는 약 30명~40명 정도 탈수 있는 배임
하여간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장계 등에도 90??~130?? 척 정도를 격침 즉 파손 피해를 시켰다는 기록들은
어디에도 없음
위에 말했듯이 이순신의 난중일기의 정유일기 2의 9월 16일자만 봐도 마지막 부분에
"적선 서른한 척을 쳐부수자(당파 -- 배를 돌진시켜 부딪쳐서 깨부수다 라는 말)"라고 돼있을 뿐임
참고로 여기서 일본측 중국측 기록은 뺐음
참고로 여기서 일본측 중국측 기록은 뺐음
하여튼 나머지 일본 해군들이 무혈로 전라도에 입성 그 곳에서 일본 육군과 합세해
전라도 전역을 초토화 시켜버렸음
이게 명량 대첩??
그리고 명량 해전때 일본군이 8000~9000명
이상 죽었다고 역사책에 실은 역사 학자들이 누구들일까??
조선측 기록들과 난중일기 기록들에서 전혀 그런 기록들이 없는데 말이지
참고로 일본측 기록에는 있음
<명량
해전때 일본군 총 병력 수 : 도도 다카토라-2,800. 가토
요시아키-2,400. 와키자카 야스하루-1,200. 구루시마
미치후사-600. 간 미치나가-200 으로 총 7,200명>
총 병력 수가 7,200명인데 8000~9000명 죽었다고 한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
참 한심함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
하여튼 무슨 역사를 추리 추정해서 씀??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은 추리 탐정을 해도 괜찮다고 봄 추리 소설을 엄청 잘씀
참고로 요즘 양심있는 역사 학자들이 명량해전때 일본군 죽은 수를 줄여서 3000~4000명 정도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도 추정임
한마디로 한중일 기록들에서 일본군의 죽은 수는 기록에 전혀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음
다시 말해서 불명임
그리고 명량해전에 패한 후 다음에 벌어진 전투들 즉 조명 연합군의 "사로 병진 작전" 인 "울산성 1차 2차 전투" 와 "순천 왜교성 전투" 도 조.명 연합군이 다 패했고 "사천성 전투" 에서는 일본의 명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한테 개박살이 났음
이 사천성 전투는 세계사에 기리기리 남을 전투임
이 사천성 전투는 세계사에 기리기리 남을 전투임
참고로 이순신은 명량해전에 패한 후 1년
후인 "순천 왜교성 전투" 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음
그리고 부산포 해전도 진 전투임(중국 일본에서는 일본이 이겼다라고 주장을 함)
하여간 명량해전이 대승?? 이라고 우리나라에;서 말하는데 다음에 벌어졌던 전투들을 계속해서 졌고 해상권도 조선 수군이 가지고 오지 못했음
그리고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계속 싸움을 했어야 했음
참고로 한중일중에 우리나라가 가장 심하게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