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난 후의 일화들....
백제(百濟)와
함께 신라(新羅) 를 공격하였으나 패배 ( 562년 07월(음) )
<.... (중략) 鬪將自就營中 悉生虜河邊臣瓊缶等 及其隨婦 于時 父子夫婦 不能相恤 鬪將問河邊臣曰 汝命與婦 孰與尤愛 答曰 何愛一女 以取禍乎 如何不過命也 遂許爲妾 鬪將遂於露地 姦其婦女 婦女後還 河邊臣欲就談之 婦人甚以慙恨 而不隨曰 昔君輕賣妾身 今何面目以相遇 遂不肯言 是婦人者 坂本臣女 曰甘美媛 同時所虜 調吉士伊企儺 爲人勇烈 終不降服 新羅鬪將 拔刀欲斬 逼而脫褌 追令以尻臀向日本 大號叫叫咷也曰 日本將 嚙我臗脽 卽號叫曰 新羅王 㗖我臗脽 雖被苦逼 尙如前叫 由是見殺 其子舅子 亦抱其父而死.... (후략)>
--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긴메이
천황) 23년
해석 :
<... (중략) 신라 장군이 스스로 군영에 나아가 河邊臣瓊缶(하변신경부- 카와베노오미 니에) 등과 그를 따라왔던 부인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 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장군이 河邊臣(하변신- 카와베노오미
니에)에게 “너의 목숨과 부인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아끼는가” 라고 묻자 “어찌하여 한 여자를 아껴 화를 취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라
대답하고 첩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은 마침내 벌판에서 그 여자를 간음하였다.
여자가 후에 돌아가니, 河邊臣(하변신- 카와베노오미 니에)이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
“옛날에 당신이 저의 몸을 가볍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로 만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승락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坂本臣(판본신-사카모토 오미)의 딸인데 이름을 甘美媛(감미원-우마시 히메이)라 한다.
함께 사로잡혔던 調吉士伊企儺(주길사이기나-쯔키노이키나) 은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잠뱅이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일본으로 향하게 하고 “일본 장군은 내 엉덩이를 물어라” 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 부르짖는다(叫(규) 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소리쳤다.
비록 고통과 핍박(고문)을 받았으나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舅子(구자-오지꼬) 역시 그의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후략)>
--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긴메이
천황) 23년
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이 세운 전라왜구+큐슈왜구와
중국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 가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한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짐
그리고 신라 장수들이 왜놈(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왜국)들과 중국 한족놈(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들 의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희롱하고 죽이고
했음
참고로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는 상대편과 싸울때 무조건 전부 몰살하는게 원칙이였음 -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 다 나옴
왜냐면?? 상대편이 아에 보복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임
하여간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
역시 한민족 최고의 전투민족은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훈족(흉노족) 가야 부여
진국 삼한 금나라 청나라 그리고 아메노 히보코(이즈모) 포함) 밖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