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해 중국 이민자 후손인 문 정권이 뜬금없이 이순신의 "명량해전" 을 들먹였음
자 그런데 명량해전은
정말로?? 이긴 전투일까??
이건 예전에 한번 여기에 썼는데 다시 한번 상기를 해 보는 의미에서 이걸 다시
한번 보기로 하자
<명량해전의 양측 기록들>
[명량해전은 1597년 9월 16일에 일본 해군과 조선 해군과의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한국에서는 명량 대첩으로 불리며 이순신이 이끄는 소수의
조선 해군이 다수의 일본 해군을 격파시킨 전투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순신의 해군이 일본 해군의 선봉 부대를 격파시켰으나
해상권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멀리 후퇴했다.
명량해전 경과 :
이순신 해군이 열세였기 때문에 명량도로 물러났다.
이곳은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조류가
빠르고 큰 소용돌이 치고 있는 지역이다.
일본 해군 수십 척(조선
측 기록에서는 130여척 혹은 133척)이 명량도로 향했다.
다른 전함은 뒤로 빠지고 그(이순신의 함대)가 탄 배 한 척만 일본 해군과 싸웠다.
이 싸움에서 일본해군 제독인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했다.
이순신이 의연히 싸우자 뒤로 빠졌던 조선의 전함들이 나서
참전했다.
치열한 전투 중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하고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떨어졌다.
도도 마고하치로와 도도 카게유가 조선 해군을 물리치고
모리 다카마사를 구조했다.
이 해전에서 조선 해군의 손해는 경미했으나 중과부적이라 퇴각했다.
일본 해군은 생소한 수로로 인해 조선 해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다음날에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전날의 전장을 둘러보았다.
이때 이순신 해군은 그곳에서 머나먼 외도(신안군 지도읍)에 있었다.
명량해전 이전에 충청도까지 진출했던 일본육군이 그 해전 후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들이 전라도 서해안을 제압시키자 이순신 해군이 북쪽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제대로 된 반격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9월 19일에는 영광군 앞바다로, 9월 21일에는 군산
앞바다로 후퇴했다.
일본 해군은 명량 해전 다음 날에 조선 해군의 근거지인 진도를 점령했다.
그 다음 날에 전라남도 서해안 지역에 진출했다.
이곳에서 육군과 만났다.
일본 육군과 해군이 전라도 전역의 소탕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일본 해군이 명량을 떠난 후인 10월 8일에야 이순신 해군이 그곳으로 귀환했다.
본래 근거지는 파괴된 관계로 고금 섬(완도군 고금면)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이순신 해군이 재건하는 데에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명량해전 평가 :
일본 해군의 선봉대를 격파시킨 이순신 해군이 전라도 북단으로 철수하고
일본 해군은 그의 근거지를 점령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전략적으로 볼 때 명량해전은 일본 해군이 승리한 전투였다.
현대 한국에서는 명량해전을 "일본에 대승한 해전"으로 선전하고 있다.
일본 해군의 참가 병력이 군선 133척, 운송선 200척이고
손실이 침몰 31척, 대파 92척, 전사 8000~9000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본, 조선
양편의 사료를 하나도 보지 않고 하는 소리이다.
그때 일본 해군의 전체 수효는 도도 다카토라(2,800), 가토 요시아키(2,400), 와키자카
야스하루 (1,200), 구루시마 미치후사(600), 간
미치나가(200) 모두를 합해도 8,000 명이
못되었다.
명량해전에서는 대형 선박인 아타케부네(安宅船)를
쓰지 않고 중형 선박인 세키부네(関船) 만
썼다.
이순신 자신이 저술한 "난중일기"에만 의거해도, ‘당파’라고
했지 ‘격침시켰다’고는 하지 않았다.
일본 측의 전사자 수효는 아예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일본 측의 기록은 차치하고 조선 측 기록(이순신 자신의 기술과 다른 사료)에만 의거해도 명량전투는 조선 해군 12~14척이 일본 전함 30척 혹은 31척을 공격한 후 후퇴한 전투였다.
한국에서 명량해전 전말은 역사 교과서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일본해군을
궤멸시켜, 그들의 침공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명량해전 후에 북쪽으로 퇴각했고
이에 일본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당시 이순신이 전장으로부터 이탈, 도주하여
일본해군이 무혈로 서해안에 진출했다.
따라서 그가 문책당해야만 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조선 정부도 느끼고 있었음은 조선 측 기록을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 조선 정부가 명량에서 승리?? 거둔
이순신에게 아무런 포상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승리한 해전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볼때 일본해군의 승리였음]
참고로
<조선왕조실록> 에는 "작은 승리" 라고 나옴
그러나 이걸 믿어야 할까??
이순신 난중일기에서는 승리?? 라는 말은 나오지도 안는데 말이지
그리고 <난중일기> 에 나오는 명량해전의 전투 내용에는 작은 배 세키부네 31척을 당파하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도망을 쳤다라고 나옴
또 이것으로 일본군이 서해안에 진입을 못하고 많은 수가 죽었다라고 선조한테 보고를 했는데 난중일기에는 일본군 죽은 수가 전혀 나오지도 않고 이순신 바램과는 달리 일본군은 다음날 바로 서해안에 입성을 함
이순신의 부산 방화 사건 거짓 징계와 정유재란 발발 전 막으라고 했던 가토의 적은 수의 병력을 간만 보고 무사통과시켜 준 이순신을 선조가 과연 믿었을까??
일본측에서는 "일본군의 승리"
왜냐면?? 이순신이 작은 중형배인 세키부네 31척만 당파를 하고 북쪽으로 계속해서
후퇴 도망치는 바람에 다음 날에 진도를 입성을 해 진도를 초토화 시켰으며 그 다음날에 서해안에 입성을 해 전라도 전역을 초토화 시켰기 때문임
중국측 기록에서는 명량해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않나옴
그리고 패한 전투인 명량해전을
우리나라에서는 명량 대첩?? 이라고 하는데 대첩이면 아주 크게 이긴 전투인데 왜?? 이순신의 함정들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후퇴 도망을 쳤을까??
한마디로 대첩?? 도 아닌데 우리나라에서 뻥을 쳤던 것임
자 그러면 패한 전투인
명량해전 다음에 일어난 울산성 1차 2차
전투, 순천 왜교성 전투, 사천성 전투등은
어떻해 되었을까??
그리고 정유재란(게이초노에키) 발발전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의 적은 병력을
무사통과 시켜 주는 바람에 전라도 지역이 어떻해 되었을까??
그리고 임진왜란(분로쿠노에키) 발발전 이순신이 참전한 녹둔도 참변 혹은 전투에서는 어떻해 되었을까??
그리고 명량해전에 대한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들과 다른 역사책들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음
즉 우리나라에서는 패한
전투인 명량해전에서 일본놈들의 죽은 수를 이렇게 써 놓았음
<일본 해군의 참가 병력이 군선 133척, 운송선 200척이고 손실이 침몰 31척, 대파 92척, 전사 8000~9000명
혹은
전선 100여척이상
완파. 이외 전선 다수 파괴.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칸 마타시로 마사케가 전사. 최소 8000여 명 전사 추정>
<-- 이렇게 말이지
그런데 정사(초판)인 <조선왕조실록> 과 <난중일기> 에 이 내용들이 나올까?? 는 각자 한번 찾아보길
참고로 여기서는 일본측 기록은 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