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1, 2022

2008년 광우뻥 선동 사태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 주범 MBC

[2008년 광우뻥 선동 사태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 주범 MBC]

이것도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2008년 이명박 정권 초창기때 갑자기 MBC 언론에서 미국산 소고기 광우병 방송을 함.

내용은 간단했다.

“이명박 정부가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를 들여온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광우병에 걸리면 치료약이 없는 100프로 치사율이라고 했었고 미국산 소고기는 저렴하기 때문에 부대에 급식용으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화장품 라면 스프등에 원료로 쓰인다고 했고 광우병으로 죽은 소가 거름으로 쓰여지고 그 위에서 자란 식품들에도 광우병 발생인자가 남는다고 했음.

그리고 방송에서 어떤 사람이 한국 사람들은 광우병이 잘 안걸린다고 하자.

미국인들은 30프로이고 한국인들은 95프로로 광우병 소를 먹었을 때의 발병 확률이 있다 라고 좌파 언론들(특히 MBC)에서 선동 뉴스들을 내보냈음.

우파 언론들(조중동-참고로 지금 중앙일보(JTBC)는 좌파 언론이 되어버렸음)은 이건 괴담 선동 뉴스들이라고 보도를 했지만 벌써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대다수 국민들은 이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가 거짓 괴담 선동이라는 것을 믿지를 안았음.

또 MBC 100분 토론에서 시민 한명이 그래도 미국산 소고기를 먹겠다고 하자.

100프로 가짜 신라계 손석희가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 확률이 95프로라 말했음.

그래서 그 전화 건 사람을 방청객들이 비웃고 무안을 줬음.

심지어 한국경제 정규재 주필도 100분 토론에 나가서 이건 다 괴담 선동 허위라고 말했었고 그 당시 민주당 의원한테 공론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국민들과 촛불시위를 같이 하냐며 이건 반칙 아니냐라고 하니 방청객들이 정규재를 비웃고 무안을 줬음.

하여튼 근거없는 광우병 허위 선동으로 광화문에 10만명 정도가 모여서 촛불시위를 했었는데 자정이 넘어가자 갑자기 촛불시위가 불법 폭력 시위로 변질이 되었고 광화문으로 돌진할려는 시위자들을 막을려고 경찰들이 많이 다치고 심지어 시위대들 중에 경찰들한테 새총까지 쏘는 사람들도 있었음.

그리고 경찰 버스등이 많이 부서졌음.

그래서 할 수없이 경찰 버스들로 청외대 오는 길을 다 막아버림(명박 산성).

참고로 이 명박 산성 원조는 노무현 정권때였음 일명 무현 산성(한미 FTA 협상) 이 원조임.

그리고 그 당시 노무현도 시위자들한테 청와대로 가는 것은 옳지 안다고 말했음.

하여튼 이 시위가 점차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심지어 유모차 촛불부대까지 등장했음.

참고로 이 유모차 촛불부대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세월호 실소유자인 구원파 유병언이라고 유병언 전 최측근이 종편에 나와서 말했는데 아직 확실하지는 안음.

그런데 2달 동안 계속 되어진 촛불시위자들의 진압과정에서 강제 진압을 했다며 좌파 언론들에서 보도했는데 노무현때 한미 FTA 시위는 더 강하게 시위진압을 했었다는게 함정임.

그리고 이 광우병 시위 하는동안 이명박 OUT 은 물론이고 미군 철수등의 구호를 외치는 좌파 세력들도 많이 있었다는 점임.

한마디로 반미 성향의 좌파 시위자들.

이 광우뻥 선동 사태는 이명박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난후 진정 국면으로 들어섰고 좀 잠잠해 지자 시위 주동자들과 경찰 버스등을 부수고 경찰들한테 상해를 입힌 시위자들을 잡아 들였고 유모차 촛불부대들도 조사를 했음.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 인터넷 포펄 다음 아고라 논객 미네르바 사건이 있었음.

하여간 이 사건으로 두석달 동안 이명박 정권을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음.

그러나 좀 잠잠해 지는가 싶더만 2011년 난데없이 민주당 정동영이 철도운영권 다툼이 벌어진 과테말라 철도 사태를 ISD(투자자 국가 소송제도)탓으로 낙인 찍으면서 이런 사건이 수십 수백 건이라고 했음.

그런데 2007년 노무현 정부가 ISD를 택했을때 당시 가만히 있다가 난데 없이 이명박 정권때 이걸 들고 나온 이유가 언론사들은 일제히 이것은 2008년 광우뻥 헛소동과 빼닮았다고 했음.

이 괴담은 황당한 수준이 였었음.

사법주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꼴이라고 주장하는 노골적이 반미 선동 부터 시작해서 공공정책을 무력화하는 괴물이라고 했고 맹장수술 2000만원이 현실화될 것등이라고 했음.

그리고 볼리비아의 수돗물 사태나 미국 회사가 철로 위 불법거주지를 쫓아내라고 정부를 상대로 제소했던 과테말라의 철도 사태도 싸잡아 ISD 탓으로 포장 했음.

하여간 광우병 사태가 20년 30년 후 어떻게 역사에 기록 될지는 모르지만...

친일파 한민당의 후예들인 민주당은 나중에 광우뻥 선동 사태를 “광우병 촛불시위 민주화 운동” 아니면 “미국 소고기로 인한 촛불시위 독립 운동” 이라고 포장거나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바뀔수도 있다는 것임 아니 100프로 바뀜.

왜냐면? 친일파 한민당의 후애들인 민주당과 좌파들은 그렇게 하고도 남기 때문임.

그리고 촛불시위하는데 돈은 누가 빌려 줬을까?

누구긴 누구야 공산당 중국이지.

Tuesday, February 15, 2022

왜인들은 정말로? 한반도(특히 전라도 지역)에 기원전부터 살고 있었을까? (feat.<삼국사기>)

죽령을 개척하고 왜의 사신이 오다 ( 158년 03월(음)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02r_0020_0070&types=r

五年, 春三月, 開竹嶺. 倭人来聘.

해석 :

5년(158)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척하였다(혹은 열었다). 왜(倭)의 사신이 예물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 조


참고로 죽령은 경상북도 영주시와 충청북도 담양군 사이임


왜에 큰 기근이 있어 많은 왜인이 신라로 넘어오다 ( 193년 06월(음)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02r_0030_0180&types=r

六月, 倭人大饑, 來求食者千餘人.

〔10년(193)〕 6월에 왜인(倭人)들이 큰 기근을 겪어, 〔우리나라에〕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하였다.

- <삼국사기> 벌휴 이사금 조


자 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왜인들은 정말로? 한반도에 살았을까?

김부식이가 왜인들이 어디에서 온 걸 줄은 몰랐지만 어느 정도 힌트는 주고 있는 셈임.

그렇다 왜인들은 한반도 특히 전라도 지역에 기원전부터 한반도로 와서 살고 있었음.

왜냐면? 왜인들의 조상 나라들인 오나라 월나라가 기원전에 멸망했기 때문임.

세종(이도) 은 한글을 발명하지 않았다 (feat.<파스파 문자와 세종(이도) 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세종대왕은 한글을 '발명'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정광, <한글의 발명>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425

(중략)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지어서 내놓았다고 하더라도, 이 글(훈민정음)은 '조선 사회를 이루던 99퍼센트에 이르던 백성(시골 농사꾼)'이 쓰도록 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시골 농사꾼이 배워서 쓰라고 하는 훈민정음이 아닌, 1퍼센트 권력자와 지식인이 '중국글과 중국말'을 제대로 배워서 쓰도록 도우려고 하던 훈민정음입니다.

(중략) 조선 사회 권력자와 지식인이 중국글하고 중국말을 제대로 익혀서 '외교'를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니, 중국을 둘러싼 여러 겨레 가운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무척 뜻있고 훌륭한 '발명'을 한 셈입니다.

(중략) 직접적인 파스파 문자의 제정 동기는 몽고 위구르자가 한자의 발음을 전사하기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파스파 문자의 한자음 표음은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한자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즉, 한자음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음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므로 표음문자인 파스파자는 한자의 발음을 표음하는 데 더할 나위가 없는 좋은 발음기호였다. (121, 313쪽)

(중락) 세종 임금은 '조선 사회 권력자와 지식인'이 '중국말하고 중국글'을 잘 익히도록 이끌려는 뜻에서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글'을 짓습니다.

(중략) <한글의 발명>을 읽어 보면, 훈민정음을 세종 임금이 새로 지을 적에 '파스파 글'을 많이 살폈다고 합니다.

(중략)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고, '국문' 즉 나라의 글자는 일본의 가나 글자를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어학회가 억지로 만든 이름이 한글이다.

따라서 한글이란 명칭은 역사적으로 보면 슬픈 이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2쪽)

(중략) 그런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언저리에 '한글'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태어납니다.

(중략)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만 있을 적에 이 글은 그냥 '중국말 받아적는 발음기호'였습니다.

(중략) 한글도 그런 역할을 기대하면서 만들어졌다.

즉, 처음에는 당연히 올바른 한자의 한어음, 즉 당시 중국의 표준음인 정음을 표음하는 기호로 만들어진 것이다. (52쪽)


<-- 결론 : 한글은 파스파 문자를 모방해서 만든 글자고 백성들을 위해서 만든 글자가 아니며 1프로의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이 훈민정음을 익혀 중국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중국말 좀 잘 해봐라 해서 만든 글자다.

즉 중국 이민자 후손인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었다.

Friday, January 28, 2022

전라도에서 또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어짐(feat.나주)

마한 중심지 나주서 '장고분 추정' 유적 첫 발견…비밀 풀리나 (2021.12.05)

https://newsis.com/view/?id=NISX20211204_0001675843

[단독] 나주 '장고분' 보존키로 잠정 결정…고속도로 선형 변경 (2022.01.18)

https://www.fnnews.com/news/202201181029173188

고속도로 공사 중 고대 무덤 발견…나주 ‘장고분’은 처음 (2022.02.01)

https://n.news.naver.com/article/056/0011205436

https://youtu.be/kmRscDXN_4Y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385704


<-- 위에 뉴스에서 틀린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전라도는 마한 지역이 아니라는 것임.

중국 문헌들인 <삼국지> <후한서> 의 한민족 내용을 보면 마한 밑 그리고 변한의 독로국 옆에 분명히 왜인들이 산다라고 다 나옴.

즉 전라왜구 임나가 실제로 존재를 했다는 것임.

그게 지금 전라도에서 발견이 되어지고 있는 일본식 무덤들인 것임.

전라도와 정부는 자꾸 거짓말을 하지 말기 바람.

그 전라도가 마한? 지역? 이라면 일본과 삼한이 동족? 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됨.

Thursday, January 27, 2022

백제가 중국사라는 증거가 또 나옴(feat.사마왕(무령왕))

무령왕릉 근처 무덤 벽돌에 새겨진 7글자...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 (2022.01.27)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001&oid=023&aid=0003669142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01/27/6FNJRI54H5CWLDCYXP4GDR7TNI/


“(중국) 난징(南京) 사람이 이것을 만들었다.”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 근처 백제 고분에서 명문(銘文)이 새겨진 벽돌이 새로 확인됐다고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7일 밝혔다.

확인된 명문은 29호분 입구를 막는 데 쓰였던 벽돌에서 나왔으며, 글자 내용은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 ‘이것을 만든 사람은 건업(중국 난징의 옛 이름)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건업은 삼국시대 오(吳)나라부터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으로 이어지는 중국 남조 국가들의 수도였다.

연구소 측은 “이 명문은 제작자가 중국 출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당시 백제 고분의 벽돌과 무덤의 축조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근 중국 난징에서는 백제 벽돌 무덤의 원형으로 보이는 손오묘(孫吳墓) 등 전축분이 발굴됐다. 

연구소는 과거 29호분 근처 6호분에서 발견된 벽돌에 새겨졌던 ‘양(梁)’이란 글자 역시 남조의 양나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명문이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인지 ‘무덤 전체를 만들었다’는 의미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연구소는 3차원 입체 정밀 분석 등을 통해 글자를 명확히 판독해 백제 서체의 복원 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다.


<-- 왜인(특히 야요이인)들과 백제인들은 4세기때 중국에서 일어난 팔왕의 난, 영가의 난, 비수대전 특히 영가의 난때 중국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엄청나게 넘어 간 중국 짬뽕들이였다는 것이 지금 하나 둘씩 고고학적으로 다 밝혀지고 있는 상태임.

왜 5 왕만 봐도 왜왕이 중국 남조 지역에 사마씨의 성을 가진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다라는 것이 중국 문헌인 <송서> 에 다 나옴.

그리고 사마왕(무령왕) 도 중국에서 왜국으로 넘어 간 사람인데 이 사람은 개로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

왜냐면? 중국사인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개로왕뿐만 아니라 개로왕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라고 <일본서기> 에 다 나오기 때문임.

그래서 이 무령왕은 왜왕이 백제에 가서 백제왕 하라고 해서 백제왕이 된 인물임.

즉 무령왕은 왜왕의 신하였다는 것임.

당연히 왜국과 백제는 중국 남조 왕조들의 신하 나라들이였고.

하여간 이제 속일 수가 없음.

백제가 중국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