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때 중국사인 고구려는 운이 좋았다 (feat. 수나라 양현감의 난 그리고 고구려가 수나라에 항복을 청하고 속죄를 하다(feat.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煬帝(양제)가 帝位(제위)를 이어 받으매 天下(천하)가 전성하여, 高昌[國]王(고창국왕)과 突厥(돌궐)의 啓人可汗(계인가한)이 친히 대궐에 나아와 朝貢(조공)을 바쳤다.
이때 元(원 - 고구려 영양왕)에게 入朝(입조)케 하니, 元(원 - 영양왕)이 두려워하여 자못 藩臣(번신)의 예절을 소홀히 하였다.
(중략)
[大業(대업)] 9년(A.D.613; 高句麗 嬰陽王(고구려 영양왕) 24) 에 [煬]帝(양제)가 다시 親征(친정)하였다.
이때는 諸軍(제국)에게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勑旨(칙지)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城(성)을 공격하니,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이 무렵 楊玄感(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反書(반서)가 도착되자, [煬]帝(양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로 六軍(6군)을 이끌고 돌아 왔다.
[이때] 兵部侍郞 斛斯政(병부시랑 곡사정)이 高[句]麗(고구려)로 망명하여 들어가니, 高[句]麗(고구려)가 정보를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추격을 가하여 후속의 부대는 대부분 패하였다.
[大業(대업)]10년(A.D.614; 高句麗 嬰陽王(고구려 영양왕) 25) 에 또 다시 天下(천하)의 군사를 징벌하였으나, 때마침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인민이 流亡(유망)하고, 곳곳마다 교통이 두절되어 군사가 대개 期限(기한)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
遼水(요수)에 이르자, 高[句]麗(고구려)도 피폐되어졌기 때문에 使臣(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는 동시에 斛斯政(곡사정)을 압송하여 속죄하였다.
[煬]帝(양제)는 이를 허락하고 懷遠鎭(회원진)에 주둔하면서 降款(항관 – 항복하여 성심을 다함)을 접수하였다.
아울러 포로와 노획한 軍器(군기)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煬帝(양제)는] 京師(경사)에 이르러 高[句]麗(고구려)의 使者(사자)로 하여금 친히 太廟(태묘)에 告(고)하도록 한 뒤 억류시켰다.
이어서 元(원 – 영양왕)을 불러 들여 入朝(입조)토록 하였으나, 元(원)이 끝내 오지 않았다.
[煬]帝(양제)는 諸軍(제군)을 엄중히 정비하여 다시 토벌할 것을 꾀하였으나, 마침 天下(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걸국 시행하지 못하였다.
- <수서> 동이열전 중국 북조 선비족 고구려
참고로 수나라 양제는 폭군이였음
그래서 양제가 집권하는 동안 민란이 무려 120여건이나 일어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