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뉴스 내용들을 살짝 한번 보자
<2000년대 초반 풍납토성 경당 유적에서 출토된 중국산 시유도기. 장독
같은 이 대형 항아리 용도를 놓고 국내 학계는 생선뼈 등이 나온 점을 들어 젓갈통으로 추정했으나, 왕즈가오는
“원래 술동이로 수입한 것을 재활용했다”는 새 견해를 내놓았다.>
<중국 왕즈가오 교수 논문 파장
토성 축조 3세기 근거 ‘시유도기’
4~5세기 유물이라 파격 주장
학계 “납득못해” “연구해봐야”>
<성안 창고터 경당 유적 등에서 30점 넘게 쏟아진 항아리들은
크기가 50㎝를 넘는 대형이고, 일부는 겉에 재복의 상징물인 동전 모양 ‘전문’(錢文)까지
찍혀 단연 주목받았다.
학계는 3세기 중국 동오~동진시대
빚은 것으로, 풍납토성 출토품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제작시기(편년)가 명확한 유물로
해석했다.>
<이런 근거를 확대해 대형 토목공사의 결과물인 풍납토성 축조 연대는 3세기
전반·중반까지 올라갔다. 학계·언론은 ‘한국판 폼페이’라며 흥분했다.
고대 왕국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가서야 성립된다는 일본 식민주의 실증 사학자들의 학설을 뒤집는 근거를 마침내 찾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최근 통설로 굳어져온 국내 학계의 이런 견해를 뒤집는 중국 학자의 논문이 발표돼 파장이
일고 있다.
중국 남조·백제 유물 교류사를 연구해온 왕즈가오 난징사범대 교수.
그는 지난 21일 ‘동북아시아 속의 풍납토성’이란 주제로 열린 서울 한성백제박물관 국제학술회의에서
논고를 통해 풍납토성 출토 시유도기 등으로 판단해볼 때 축조 연대는 3세기로
올려잡을 수 없고, 중국 동진 중·후기에서 남조 초기인 4세기
후반~5세기 중·후기에 쌓은
것이란 파격적 주장을 내놓았다.>
<…(중략) 풍납토성을 비롯해 인근
몽촌토성,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 전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터 등의 출토 시유도기와 모양·태토·유약
등이 유사한 남조 유적의 시유도기 표본을 찾아내 맞춰본 것이다.>
<그 결과 국내 학계가 주장해온 3세기 동오와 서진시대의 도기 특징은 보이지 않았다. 옹 같은 대형 그릇의 모양이나 유약을 바른 형태 등에서 4~5세기 동진과 남조 초기의 유송시대 도기의 특징만 확인됐다고 한다.>
<그의 발표는 고대 왕국 백제가 4~5세기께야 등장한다는 기존 실증사학자들의 주장을 되레 뒷받침하는 내용이어서 국내 학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남조 고고학 연구자인 조윤재 인제대 교수는 “왕즈가오의 분석은 국내 학계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고민거리를
안겨준 것”이라며 “중국 남조·백제 유물의 비교 연구 심화를 통해 풀어야 할 것”이란 견해를 내놓았다.>
먼저 중국, 일본, 서양의 고고학 연구 분석 수준>>>>>>>>>넘사벽>>>>>>>>>>>>>우리나라 고고학 연구 분석 수준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발견이 되어진 100프로 짱개 남조 왕조들의 유물들이 동진(420년) 이후의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앙즈가오 교수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발견이 되어진 100프로 짱개 남조 왕조들의 유물들이 동진(420년) 이후의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앙즈가오 교수
당연히 중국 남조 시대 유물들과 비교 분석을 해서 발표를 한 것임
자 그럼 동진 후때의 유물들이면 한성 백제(짱개
남조 괴뢰국 백제(쿠다라)의 2번찌 도읍)는 빨라야 5세기 초 늦어야 5세기 중 후반때 일임
그렇다면?? 일제 시대때 일본놈들이
주장한 것이 거의 맞다는 소리임
참고로 토성의 원조는 중국임
그런데 중국 문헌들에 삼한에는 토성을 축초했다는 기록들이 전혀 없음
자 그럼 짱개 남조 괴뢰국 벡제(쿠다라)는 이렇게 정리를 할 수가 있음
<1기 백제 - 313년?? ~ 427년: 황해도(대방 백제) = 114년
참고로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현 황해도)이 313년때 망했고 중국 본토에서 “영가(307년~312년)의
난(311년에 일어남)” 으로 인해서 대규모 짱개놈들이 한반도로
건너 옴
2기 백제 - 427년 ~ 475년 - 한성
백제 시대(서울 풍납동) = 48년
3기 백제 - 477년?? ~ 660년 - 충청
백제 시대(웅진, 사비) = 183~185년>
자 그런데 중국 일본 역사 학자들과 고고학 학자들이 맞을까??
아니면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과 고고학 학자들이 맞을까??
참고로 한국 고고학 학자들이 중국 일본 고고학 학자들보다 훨씬 더 늦게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기 시직했음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어지는 고고학적 유물들은 무조건 중국 일본 서양 고고학자들과 공동으로 조사 분석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