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8, 2021

백제는 중국사다 (feat. 중국 양나라의 "후경의 난" 때 통곡을 한 백제 사신들과 양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요청한 백제 - <양서>)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일어난 후경의 난(侯景--548)

이 후경의 난을 본 백제(쿠다라) 사신들이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내용이 <양서> 에 나오는 내용과 양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요청을 한 백제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이 내용을 한번 보기로 하자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jo&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o_008r_0010_0030_0050&position=-1

中大通六年(534)•大同七年(541), 累遣使獻方物; 幷請涅盤等經義毛詩博士, 幷工匠畫師等, 敕並給之. 太淸三年, 不知京師寇賊, 猶遣使貢獻; 旣至, 見城闕荒毁, 並號慟涕泣. 侯景怒, 囚執之, 及景平, 方得還國.

- <梁書東夷列傳 百濟 中大通 6


해석 :

[中大通(중대통) 6(534)과 大同(대동) 7(541) 에 거푸(자주 혹은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涅盤經(열반경) 등에 대한 義疏(의소책의 뜻을 풀이함 혹은 문자의 뜻을 해명함)와 毛詩博士(모시박사) 및 工匠畫師(공장화사) 등을 구하므로모두 공급하여 주도록 詔敕(조칙) 하였다.” (혹은 모두 공급하여 주었다.)

太淸(태청) 3(549)에 京師(경사 - 양나라 수도)가 적에게 침범당한 것을 모르고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사신이 [國都(국도)] 이르러 궁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자, 侯景(후경)이 노하여 사신을 잡아 가두었다. ()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양서> 동이열전 백제(쿠다라) 내용 중에


<-- 중국 남조 양나라 시대대 후경의 난(侯景--548) 이 일어났는데..

이 난을 본 백제(쿠다라) 의 사신들이 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내용이 양서에 다 나옴

?? 통곡까지 하고 울었을까??

무슨 본국(고향)??

하여간 왜?? 통곡까지 하고 울었는지는 각자 생각해 보길


그리고 양나라에 기술자들을 파켠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 내용이 나옴

참고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축조 해준 기술자들이 바로 양나라 기술자들임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훈족(흉노족) 가야 부여 진국 삼한 금나라 청나라 그리고 아메노 히보코(이즈모) 포함)처럼 독특한 스키타이 흉노족들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관묘)도 아니고 그냥 중국식으로 짓고 중국풍(중국의 도교 사상)으로 장사 지내고 했음

참고로 저때 당시 무덤양식은 아주 아주 보수적이였기 때문에 거의?? 절대로 안 바뀜


Sunday, March 21, 2021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김씨 왕족들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2탄

역사스페셜 -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https://youtu.be/pddZiVtgIGA?list=PLB1E03DA95009F17C&t=376

KBS 역사스페셜신라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KBS 2009.7.18. 방송

https://youtu.be/Cp0K80v4XYg?t=2176

 

<-- 스키타이족들과 신라인들이 하나의 유전자 그룹으로 묶였음

신라만 괜히 골품 제도가 있었던게 아님

하여간 이것으로 끝난것이다 다름없음

 

결론 :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김씨 왕족들은 흉노족들이 100프로 맞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키타이족들

서양인들이였다


Saturday, March 20, 2021

중국 이민자 후손이자 과대포장되어진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었다 (feat. <조선왕조실록>)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1019_002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부절과 고서를 받다]

명나라 황제는 대감(大監) 황엄(黃儼)을 보내어, 정사(正使) 광록 소경(光祿少卿) 한확(韓確), 부사(副使)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부절(符節)과 고서(誥書)를 받들고 와서 왕명(王命)을 전달하게 되므로, 채붕(綵棚)을 매고 잡희(雜戲)를 베풀어 영접하였다.

임금은 편복을, 조신(朝臣)은 조복을 입고 모화루(慕華樓)에 나아갔다.

사신이 당도하자, 임금은 장전(帳殿)의 서쪽에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사신을 영접하여 장전 앞에 와서 말에서 내려 절(()를 받들고 장전에 들어가 용정(龍亭) 안에 고이 모시고 장전을 나오는데, 여러 관원이 앞을 인도하고, 사신은 절·고의 뒤를, 임금은 사신의 뒤를 따르고, 금고(金鼓의장(儀仗고악(鼓樂잡희(雜戲)는 다 평상의 의식과 같았다.

경복궁에 당도하자, 상왕은 궁문 밖에서 고명을 영접하고, 사신은 절·고를 받들고 근정전에 당도하니, 상왕은 전정(殿庭)에서 절·고에 먼저 절을 하고 악차로 들어갔다.

임금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사신은 절()을 받들고 나가니, 임금과 상왕은 전정에 나가 공경히 전송하고, 여러 신하는 절을 인도하며 태평관(太平館)에 당도하여, 절을 북루(北樓) 위에 안치하였다.

상왕은 태평관에 와서 사신과 더불어 사례(私禮)를 행하고 수강궁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사례를 행하고 나와서 악차에 들러, 앉아서 여러 신하와 예를 행하였다.

예식이 끝나니, 한확(韓確)은 악차 앞에 와서 네 번 절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위로하고 안장 갖춘 말과 의복을 선사하였다.

임금이 사신과 더불어 행례할 적에, 한확은,

"감히 그럴 수 없다."

고 사양하는데, 임금이 강권하여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한확은 잔치에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한확은 본국 사람인데, 그 누이가 황제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까닭으로 황제는 영화를 보여 주기 위하여 북경으로 불러들여 고명을 주어 돌려보낸 것이었다.

- <세종실록 3, 세종 1 1 19일 갑자 2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


<--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선생들이 죽었다 깨나도 안 가르쳐 주고 교과서나 역사책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내용임

하여간 중국 이민자 후손인 이도(세종) 는 사대주의 끝판왕이였다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 - 4탄

한반도서 가장 큰 고대 무덤, 열자마자 덮은 까닭은… (2021-03-18)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87244.html

<-- 이 뉴스 내용을 한번 분석을 한번 해 보기로 하자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장고봉 고분 둘러싸고 고고학계 술렁

일본 고분 닮은 얼개·제사 흔적 논란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 다시 묻어

무덤 주인은 백제 통제 받은 왜인?

일 우익 임나일본부설 근거 삼을라 우려


<-- 중국사인 백제의 통제를 받았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는 그런 내용 안 나옴

중국사인 백제가 왜국의 통제를 받았지


<최근 발굴 조사된 전남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 내부 돌방(석실)의 모습. 

주검을 놓는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현문이 정면에 보이고 납작한 판석 여러 개를 놓은 바닥면과 깬돌을 정연하게 쌓은 돌방의 벽체가 보인다.

1990년대까지 두 차례 도굴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대 단일 무덤이 새해 벽두 마침내 열렸다.

고고학자들은 5~6세기 일본 고분과 판에 박은 듯한 무덤 얼개에 놀라워했고 곧장 흙에 덮여 다시 묻힌 것에 허탈해했다.

1월 국토 최남단 해남에서 들려온 무덤 발굴과 뒤이은 복토 소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고고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 언론에 왜?? 공개를 안 했을까나??

뭐를 숨기고 은폐를 할려고??


이 유적은 전남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이다.

6세기 전반 것으로 추정하는 이 무덤의 바깥 봉분과 돌방(석실) 내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2월까지 마한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1500여년 만에 드러났다.

놀랍게도 무덤 돌방은 일본 규슈섬의 바깥 해안과 아리아케 내해 일대에서 5~6세기 조성된 왜인 귀족 석실 무덤과 구조는 물론 무덤방 입구를 막기 전 지낸 제사 흔적까지 거의 같았다.


<-- 큐슈 지역의 왜인들 무덤과 같은데 무슨 마한?? 문화연구원??

전라도 왜국 문화연구원이라고 해야지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입구에서 본 내부 공간.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조성하고 위쪽 천장에 덮개돌(개석)을 놓는 전형적인 고대 일본 규슈지역의 석실 무덤 얼개를 띤다.

천장과 벽체에는 역시 일본 고대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을 한 흔적이 확인된다. >


<-- 당연함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헸으니까


조사단은 후면 봉토를 파고 무덤방과 통하는 널길(연도)로 들어가 안쪽을 살폈다.

조사 결과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만드는 고대 규슈의 석실분 특유의 얼개가 뚜렷했다.

천장과 벽체에도 일본 야요이시대 이래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 흔적이 남아 있었다.


<-- 무덤 양식이 완전히 일본 무덤 양식과 똑같다


출토품은 대부분 도굴됐으나, 무덤 주인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유물이 상당수 수습됐다.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뚜껑 달린 접시(개배) 10점이 대표적이다.

일부 개배 안에선 조기 등 생선뼈와 육류 등 제수 음식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덩어리도 검출됐다.

“일본 고분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가 주목된다”고 조근우 연구원장은 설명했다.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고 말했다.


<-- 먹는 음식들과 제례 유물들 즉 장례풍습도 일본과 똑같다


<돌문짝(문비석)이 엎어진 채 드러난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석실 입구의 사다리꼴 현문과 내부 모습.

내부 석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4m를 넘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2m에 달하는 큰 공간이다.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깬돌을 차곡차곡 올려 벽체를 쌓는 고대 서일본 규슈지역의 무덤 석실과 얼개가 똑같다. >


<-- 일본과 게속해서 똑같다고 하는 우리나라 고고학자들과 역사 학자들


<무덤 석실로 들어가는 연도(널길 통로)의 들머리 부분 발굴현장. 토압에 따른 붕괴 위험에 대비해 윗부분 덮개돌 아래 금속지지대를 받쳐놓았다. >


장고봉 고분은 봉분 길이 82m(도랑 포함), 높이 9m에 이른다.

황남대총 등 신라 경주의 대형 고분보다 큰 국내 최대급 무덤이다.

겉모습은 일본에서 고대 국가가 정립될 당시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 모양새다.

전방후원분은 봉분의 앞쪽은 네모진 방형,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특징을 따서 일본 학자들이 지은 명칭이다.

일본 무덤 형식인 전방후원분이 고대 해상로 길목인 전남북 해안 일대에 10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은 1980~1990년대 잇따라 확인됐다.


일본 우파 세력은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라고 주장했다.

한·일 학계에서 묻힌 이의 출신지가 한반도인지 왜인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 고분군보다 큰 고분

그리고 일본 우파들이 주장을 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

그런데 중국 문헌들인 삼국지 후한서 양서등과 심지어 호태왕비만 봐도 전라왜구 임나가 존재했다는 것이 다 나오며 임나라른 지명이 다 나옴

그리고 삼국사기만봐도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가 왜국(큐슈왜구+전라왜구 임나) 이 무려 42번이나 싸운 기록들이 나옴


<공중에서 내려다 본 해남 장고봉 고분의 전경.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전방후원분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뒤쪽 원형 봉분에 역 ㄱ 자 모양의 갱을 파고 석실을 드러낸 발굴 공간이 보인다. >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의 겉모습.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근 봉분 모양인 고대 일본 특유의 무덤 전방후원분의 전형적인 모양새다. >


<-- 일본과 똑 같은 전방후원분의 형태임

이건 한민족 무덤이 절대로 아님


장고봉 고분도 논란 속에 풍상을 겪었다.

80년대 초 학계에 처음 보고됐을 당시엔 자연 지형인 언덕으로 간주했다.

80년대 중반 강인구 전 영남대 교수가 발굴 허가를 신청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불허로 외형 실측밖에 할 수 없었다.

1986년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보존 조처가 제대로 되지 않아 90년대 두 차례 도굴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이 2000년 도굴 갱을 확인하고 긴급 시굴조사로 내부를 일부 확인했지만, 공식 발굴은 20년 뒤인 지난해 가을에야 시작했다.


<-- 도굴 당하도록 방치를 했고 영남대 교수가 발굴을 허가해 달라고 신청을 했는데 다 묵살을 한 정부 관계자들 ㅋㅋㅋ

그리고 도굴이 자꾸 되니 20년이 지나 이제서야 시작을 했는데….


하지만 무덤 석실은 2월 말 다시 묻혔다.

연구원 쪽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처로, 5~9월 무덤 주구(도랑)의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발굴의 파장도 고려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조사 내용은 한반도 전방후원분 무덤 주인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지난 20여년간 백제 정부의 통제를 받는 왜인 관료·용병이란 설과 일본에 이주했다가 현지 무덤 문화의 영향을 받고 귀국한 마한인 또는 백제인이란 설 등 여러 추측이 나왔다.

장고봉 고분에서 규슈 고분과 판에 박은 얼개와 철갑옷 조각, 철촉 등 무기류가 묻힌 사실이 확인된 건 국내 학계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일본 우파 학자들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 발굴 조사한다더니 다시 묻어버림

그리고 저렇게 큰 고분군이 어떻해?? 중국사인 백제의 통제를 받을 수가 있음??

저런 큰 무덤들을 만들려면 아주 강력한 세력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지

그리고 마한?? 아님

왜인들이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조사한 장고봉 고분의 주요 출토품들. 원래 묻은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당했으나 이번에 뚜껑 달린 토기 접시(개배)와 아궁이틀 조각, 철제 갑옷과 철촉의 파편 등이 상당수 나와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조언을 새겨볼 만하다.

“장고봉 고분은 왜계 무덤 구조를 갖고 있지만, 묻힌 이를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됩니다.

외형, 구조, 유물 등을 당대 정세와 함께 살펴봐야 해요. 민족주의를 넘어 고대인의 관점까지 생각하며 열린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 권오영 교수는 이제 말을 하기 바람

중국 남조 오나라 월나라 후손들인 큐슈왜구+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는 것을 말이지

언제까지 숨기고 은폐를 할 것임??


Monday, December 28, 2020

전라왜구 임나는 실제로 존재를 했다 - 3탄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③…5세기말 완전 철수 (2019.05.21)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7

신라를 가장 괴롭히던 왜…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한반도에서 손 떼

시기 6세기 이전에 신라를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가 왜였다.

<삼국사기>에는 시조인 혁거세 8년부터 왜의 침입 기사가 나온다.

왜와 관련한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무려 50차례 가까이 나온다.

이중 대다수가 침략 기사다.

신라를 괴롭힌 왜가 한반도 왜인지, 일본열도 왜인지에 대한 뚜렷히 구분하기 어렵다. 

별도로 움직였을 때도 있었고, 서로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행동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게 왜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다.

네차례나 수도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백성 1천명을 끌고 가는 침략 세력이었다.

임금의 동생을 볼모로 잡았고, 툭하면 대신의 딸을 왜왕에게 시집오라고 했다.

신라 임금이 왜의 공격을 받고 고민하는 장면을 <삼국사기>를 통해 들어 보자.


<① 유례 12년(295년),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해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다.

백제와 도모해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늘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임금이 받아들였다.


② 흘해 37년(346년), 왜병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했다. 

또 진군해 금성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했다.

임금이 싸우고자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은 멀리서 왔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면 공격을 늦추어 그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이 받아들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이 식량이 떨어져 물러가려 하니, 날쌘 기병으로 추격토록 해 쫓아버렸다.


③ 실성 7년(408년), 임금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두고는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정예 병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했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어떠 하겠습니까?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니, 지세가 험한 곳에 관문(關門)을 만들고 적들이 오면 막아, 그들이 침입하여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다가 유리한 시기가 되면 나가서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은 끌어당기고 남에게 끌려 다니지는 않는 것이니, 최상책이라 하겠습니다.”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왜의 공격에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도인 금성을 지켜 농성하고, 왜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수세적인 방법을 취했다.

신라는 물의 싸움(水戰)에 약했다.

임금도 이를 인정했다.

바다를 건너가 선제 공격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관문을 지켜 왜병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냥 당하기만 하던 신라는 5세기 들어 해상 전략을 강화해 나갔다.

자비 임금은 즉위 6년(463년)에 담당관에 명해 전함을 대대적으로 수리케 하고, 지증왕 6년 (505년)엔 선박이용의 제도(舟楫之利)를 정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륙이 아니라, 해안에서 왜의 침공을 저지했다.

실성 14년(415년), 신라 수군이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512년 이사부 장군이 바닷길을 건너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물을 두려워 하던 신라 수군으로선 엄청난 발전이며, 신라군에 바닷 싸움(해전)에서 자신감을 얻게 한 전투였다.

왜는 고구려와 신라의 힘이 강해지면서 서서히 한반도에서 빠져 나갔다.


한반도 왜의 첫 번째 타격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10년(400년) 보병과 기병으로 무려 5만 병력을 보내 신라를 구원케 했다.

고구려군이 서라발에 이르러, 그곳에 가득한 왜군을 쳐 퇴각시키고, 왜의 동맹세력인 임나(任那)가야의 종발성(從拔城)까지 진군해 성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반도 왜는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 같다.

두 번째 타격은 신라 이사부였다.

이사부는 지증왕 13년(512년) 우산국을 정벌하고, 동해 제해권을 쥐면서 동해안 일대에 대한 왜의 노략질을 차단했다.

아울러 이사부가 왜의 동맹세력인 금관국을 정벌해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남해안 일대에 대한 해상 지배력도 확보하게 됐다.

신라가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자, 열도와 한반도 왜 사이에 수송로가 끊기고, 이에 따라 한반도 왜는 퇴로 차단에 앞서 열도로 넘어갔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에서 왜와 관련한 기사는 신라 소지왕 19년(497년), 백제 비유왕 2년(428년) 이후 사라진다.

5세기말쯤 한반도 왜가 거의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고, 잔류한 왜인들은 백제, 나중엔 신라에 동화돼 간 것으로 보인다.

160년간 우리 사서에서 사라졌던 왜가 662년 다시 나타난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열도의 왜는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5만 수군을 동원해 상륙하려다 백마강(금강) 어귀에서 전멸했다.

<문무왕 2년(662년), 손인사와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고 바닷물도 붉게 물들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에는 백강전투 장면을 짧게 소개하며,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덥고 백마강이 붉게 물들었다”며 전투의 치열함을 짧게 표현했지만, <일본서기>에는 울분을 삼키며 백촌강 전투(白村江の戦い) 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왜는 더 이상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며 영토를 열도로 국한시켰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은 왜의 침입에 대비해 죽을 때 자기 무덤을 동해 바다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서였다.


<-- 참고로 신라 소지매금대왕때 전라왜구 임나가 사라졌는게 아님

왜국과 백제와 이들의 대'빵인 중국 남조 왕조들은 같은 편이였기에 이들은 서로서로 도와주던 관계였음 

전라왜구 임나가 562년때 스키타이 아리아인 신라한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주 잔인하게 몰살을 당해 멸망을 당했다라는 기록이 <일본서기> 에 나오는데 그런데도 대빵인 중국 남조 왕조들과 백제와 왜국은 한편이라 이 전라왜구 임나의 잔존 세력들은 여전히 전라왜구 임나 지역에 남아 있었음

663년의 백강 전투 혹은 백촌강 전투를 끝으로 전라왜구 임나는 중국사인 백제와 함께 완전히 멸망을 함


Sunday, December 27, 2020

공주 송산리 6호분 축조자는 중국인이다

"공주 송산리 6호분 축조자는 중국인" (2008.12.29)

https://www.yna.co.kr/view/AKR20081227045000005

"공주 송산리 6호분 축조자는 중국인"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 양식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서, 웅진도읍기 백제왕릉임이 확실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6호분은 양(梁)나라에서 파견한 기술자의 총감독 아래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려대 고고환경연구소 조윤재 연구원은 일제시대 송산리 6호분에서 출토된 전돌 명문을 종래에는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고 판독하고 "양나라 관아에서 쓰는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해석했으나 이를 '梁宣以爲師矣'로 읽고 그 의미를 "양나라 사람인 선(宣)을 스승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중략)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 양식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서, 웅진도읍기 백제왕릉임이 확실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6호분은 양(梁)나라에서 파견한 기술자의 총감독 아래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중략)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 양식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서, 웅진도읍기 백제왕릉임이 확실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6호분은 양(梁)나라에서 파견한 기술자의 총감독 아래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공산리 고분군 현지 기념관에 전시 중인 6호분 모형 단면도.현실로 통하는 무덤길을 별도로 마련한 전형적인 중국식 전축분(벽돌무덤)으로 현실 네 멱면에는 사신도를 그렸다. 

조 박사는 한국호서고고학회 기관지로 최근 발간된 '호서고고학' 19집에 기고한 '공주 송산리 6호분 명문전(銘文塼) 판독에 대한 관견(管見)'이란 논문에서 종래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고 판독하고 "양나라 관아에서 쓰는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온 벽돌 명문을 새롭게 해석했다.

즉, 그에 의하면 기존에 '瓦'로 판독한 글자는 '以'(이)로 읽어야 하며, '官'이라는 글자도 '宣'(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판독에 따른다면 문제의 벽돌 명문은 '梁宣以爲師矣'가 되고, 그 의미는 "양나라 사람인 선(宣)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되며, 이는 결국 "양나라 사람인 선이 분묘의 축조를 감제(監制.감독)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조 박사는 이를 통해 "(송산리 6호분의) 고분 축조 책임자의 국적과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한 셈이다"고 평가했다.

이런 판독은 송산리 6호분과 봉분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거의 똑같은 벽돌무덤으로 1971년 기적적으로 발견되고 발굴된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의 축조 책임자 또한 중국 양나라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연결될 수 있어 주목된다.

한국학계에서는 대체로 중국 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입한 백제인이 축조한 것으로 보지만,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 기술자 파견설을 지지하는 견해가 많다.

(후략)

Sunday, December 20, 2020

중국사인 백제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원조가 바로 3세기 중국 동오(東吳) 시기의 묘인 주연(朱然)묘이다

'아치형 지붕'서 찾은 백제만의 부드러움 (2009-11-27)

http://www.joongdo.co.kr/web/view.php?key=20091126000000057

<중국속의 백제문화> 6. 무령왕릉속의 독창적 문화인

위의 뉴스를 내용들을 살짝 한번 보기로 하자

(중략)

백제문화의 국제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무령왕릉은 중국 육조시대(265~589년)의 묘제와 같아 계보적인 연원이 중국에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아치형 천정을 구축한 무덤은 중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 백제만의 독창적인 사례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물론 중국 육조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인 주연묘에서 아치형 지붕을 채용한 사례는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주연묘 및 육조석각 등을 통해 중국 묘지문화와 무령왕릉의 독창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아치형지붕을 채용한 주연(朱然)묘=동오(東吳)시기의 3세기 묘 가운데 하나인 주연묘는 벽돌무덤으로 난징(南京) 인근 안휘성 마안산시에 위치한다.

중국은 마안산에서 육조시대 무덤만 100여기 발굴했으며 이 가운데 대표적인 무덤이 바로 오나라 장군인 주연묘와 동오묘다.

특히 마안산시가 지리적으로 난징과 가까운 위치로 인해 문화계승에 있어서 닮은 점이 많은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지난 1984년 발굴된 주연묘는 한 무덤 안에 주연의 관과 부인의 관이 함께 안치돼 있다.

무령왕릉의 경우 왕과 왕비가 함께 안치돼 있는 것과 흡사하다.

(중략}

무령왕릉의 문이 1개인데 비해 주연묘는 2개의 문으로 돼있다.

이곳(오나라 주연묘)에서는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채색청자기를 비롯해 청자반구대, 청자양, 청자호자, 청자향로 등 모두 50여 종의 부장품들이 출토됐다.

칠기 종류만 80여점에 달한다.

백제시대 유물들과 흡사해 당시의 문화적인 교류를 짐작케 해준다.

마구간과 돼지우리 등 가축과 가축우리를 흙으로 만들어 무덤에 함께 매장했으며 진묘수와 동다리미 등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출토된 부장품들도 눈에 띈다.

(중략)

안휘성 마안산 동오묘에서 출토된 석지권(錫地券)의 경우 무령왕릉의 매지권과 흡사하다. 

(중략)

무령왕릉의 널길 한 가운데에서 발견된 진묘수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물론 국내 고대 무덤에서도 널길의 좌우 벽에 그림으로 괴수(怪獸)를 나타낸 예는 있지만 이처럼 진묘수를 제작해 세운 예는 없으므로 이 유물의 유례는 역시 중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중략)

또 부여박물관 이용현 학예연구사는 “무령왕릉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중국의 다양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실생활에 적용함은 물론 일본 등 주변국에 전파하는 등 동아시아의 허브적인 역할을 한 고대국가가 바로 백제”라고 지적했다.


일본왕은 중국인이다(feat.오태백과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문신 풍습)

[중국 문헌인 진서, 양서, 북사 왜국전에 보면 일본의 시조가 오태백이며 왜인들의 풍습으로는 문신 풍습이 있다라고 나온다] http://contents.nahf.or.kr/id/jo.k_0005_0097_0020_0010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